큰 절 주지, 다시 초발심 행자가 됐다
문중 스님들 격려 응원 받으며
무거운 책임감 갖고 주지 부임
“신도‧불자들과 함께 고민하며
‘첫 봄 맞는 절’ 만들어 가겠다”
고2 시절 광주 향림사서 출가
‘진심‧용심 갖춘 수행자’ 다짐
공부 전념하다 교구 부름 받아
남해에서 육지로 드는 첫머리에서 거대한 성벽을 마주한다. 바다를 맞대고 길게 늘어선 기암준봉의 산, 달마산이 그 성벽이다. 다르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산의 대표적 사찰이 미황사다. 지난 1월 새 주지 향문스님의 부임 소식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갓 40대가 된 승납 21년의 젊은 향문스님은 20년에 걸쳐 미황사를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로 탈바꿈시킨 금강스님을 이을 적임자로 꼽혔다. 금강스님의 명성 만큼 향문스님에게 지워진 부담도 그만큼 컸다.
“미황사 주지를 맡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어요. 다시 똑같은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거절했습니다. 전임 주지 스님이 워낙 잘 살았고,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용기가 선뜻 생기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교구 내 많은 스님들의 뜻이 향문스님에게로 향했다. 경험 많고 덕망 높은 스님이 맡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계속된 추천을 거절할 수 없었다. 무거운 책임감이 짓눌렀다. 미황사에 처음 발을 들이던 날, 향문스님은 준비해온 초와 향을 올리며 다짐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 다시 행자처럼 살아야겠다.’
처음 3개월은 어쩌면 수습 행자 같았다. 엄살을 부릴 여유도 없었다. 말을 줄이고 발로 뛰어다녔다. 남 시킬 일도 스스로 했고, 남이 하기 싫은 일은 직접 나서서 했다. 벙어리 행자, 장님 행자처럼 살며 앞으로의 삶과 미황사의 미래를 그려야했다.
미황사 주지를 맡을 수 있는 것은 분명 큰 복덕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얻지는 못했을 것이고, 많은 스님들이 추천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향문스님은 고등학교 재학시절 출가했다. 기본교육을 위한 중앙승가대 입학 전까지 3년 동안 천운 노스님과 은사 혜향스님을 시봉했다. 기침(起寢)하면 대웅전부터 모든 전각을 돌며 초와 향을 올리는 천운 노스님으로부터 출가는 신심과 원력의 삶임을 배웠다.
그렇다고 향문스님의 출가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한 삶의 연속이었다. 돌아보면 출가수행의 삶을 단단하게 만든 것도 그 어려움이었고, 지금의 향문을 만들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도 있게 됐다.
“출가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갈수록 깊어져요. 수행자로서의 삶이 자격증이나 학업처럼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걸어온 길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모르고 시작해서 모르고 끝나는 여정일 수도 있지만, 기도정진할 때에는 ‘이 생이 마쳐질 때 이런 모습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향문스님은 중앙승가대 재학 시절 부천, 광명, 광주(경기)의 절에서 부전 소임을 살아 사회복지학 학업을 이어갔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도 공부를 손에 놓을 수 없었다. 금석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거치며 재적교구본사 대흥사에서 서산대사선양회와 조선불교연구원 소임이 주어졌다. 공부하느라 등한시했던 교구 일을 하나씩 담당하며 다시 본사로 돌아올 끈이 이어졌다. 박사과정은 아예 대흥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서산대사를 주제로 삼았다. 교구내 역할이 늘면서 중앙종회의원을 맡게 됐고, 문중 스님들의 응원과 격려 속에 미황사까지 오게 됐다.
향문스님은 전임 주지 금강스님이 20년 동안 쌓아온 성과를 잘 계승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미황사를 찾는 신도, 불자들과 함께 비전을 만들어나가겠다는 뜻이 확고하다. 이미 도량불사가 충분히 이뤄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건축불사 보다는 외형에 내용을 채워나가는 계획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미래에 대한 청사진과 풀어야할 숙제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키워드를 하나씩 뽑고 있다. ‘화합’, ‘치유’, ‘휴식’, ‘회복’, ‘고향’, ‘출가’. 지금까지 얻은 답이다. 기존의 템플스테이에 테마를 담고 지금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출가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새롭게 준비하는 계획도 그 중 하나다.
“미황사는 수식어가 여럿 있습니다. 땅끝마을 미황사, 아름다운 절 미황사가 대표적인데, 여기에 따뜻하고 향긋한 이미지를 더해 ‘첫 봄을 맞는 절 미황사’라는 수식어가 하나더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끝은 곧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의미도 담고 싶어요.”
지난 3개월여간 하나하나 들여다본 미황사는 아프고 병든 곳이 적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대웅보전은 당장 해체보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아프다. 대들보가 위험한 수준이어서 업무파악이 되기도 전 문화재청과 해남군으로부터 해체보수 통지를 받고 협의를 시작했다. 1~2년에 끝날 보수가 아니어서 향문스님은 고민이 깊어졌다.
“출가수행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숱하게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고 지금 가는 길이 맞나 의문을 가질 때도 있어요. 이럴 때 스스로에게 더 당당해지고 진심으로 걸어가는 수행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어느 때보다 책임이 무겁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향문스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과 용심을 갖춘 수행자가 되리라 다짐했던 초발심이다. 출가수행의 길에 들고자 했던 굳은 신심과 원력, 인내 속에서 키웠던 출가정신을 매일매일 꼽씹고 있다. 다시 행자로 살고 있다는 말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향문스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 향문스님은
1982년 생. 어린시절을 보낸 광주 향림사가 출가사찰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재학 때인 1999년 광주 향림사에서 혜향스님을 은사로 득도, 녹원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2007년 성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중앙승가대 재학 시절 조계종 국제포교사 자격을 획득한 바 있으며, 서산대사 청허 휴정의 사상에 매료돼 서산대사호국정신선양회 사업단장과 대흥사 조선불교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이와 관련한 다양한 연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제17대 중앙종회의원이기도 하다. 지난 1월 미황사 주지로 부임해 우리나라에 첫봄을 알리는 도량으로 키워나겠다는 원력으로 정진하고 있다.
불교신문=해남=박봉영 기자
불교신문=이준엽 광주전남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