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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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기행] 아쇼카순례단사찰 순례 경주 남산(1)

1천년 전 신라 불교 유적 간직한 산 속의 박물관

2017.05.18.

종교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아 국보 제312호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 경주 남산에서 유일한 국보다.

새 정부가 들어섰다. 촛불의 함성은 멈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렇지만 일을 시작하기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創業守成). 촛불의 간절한 염원을 이어가는 것 만한 수성이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1300년 전, 변방에 불과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다. 이후 260여년 가까이 통일신라는 계속됐다.

통일 신라는 수성을 위해 불교를 근간에 뒀다. 삼국을 통일한 뒤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이전보다 불교를 더 중하게 여겼다. 주로 왕과 귀족이 믿었던 불교는 민중들에게 널리 퍼졌다.

그 현장이 지금도 남아있다. 바로 경주 남산이다.

경주 남산을 찾은 아쇼카순례단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남산은 서울, 경주, 개성 등 도성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경주 남산은 북쪽 금오산(金鰲山)과 남쪽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한다. 남북으로 대략 8㎞, 동서 너비는 4㎞로 계란과 같은 타원형이다. 경주 남산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금오산은 정상이 466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그렇지만 계곡이 깊고 바위가 많아 제법 험준한 편이다.

남산은 신라의 시작과 마지막 현장이기도 하다.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다. 49대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춤을 추며 나타나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했다. 그곳은 포석정이었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산신의 춤을 도리어 상서로운 일로 여겨 더욱 방탕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법흥왕과 함께 불교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이차돈이 527년 순교했다. 이듬해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후 신라 사람들은 남산을 하늘의 부처님이 내려와 머무는 산으로 여겼다.

삼국이 통일되고 민중들은 남산을 찾아 금생과 내생의 안녕을 염원했다. 남산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해 부처를 새기고 탑을 세웠다. 지금도 남산에는 100여곳의 절터와 80여구의 석불, 60여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다. 이들 유물 가운데 국보 1점, 보물 12점, 사적 14개소, 중요민속자료 1점, 지방유형문화재 14점, 지방기념물 2점, 문화재 자료 5점이 지정돼 남산은 그대로가 노천 박물관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산에 올라보자.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모두 40여 개의 골짜기가 있고 어느 골짜기를 오르더라도 가는 곳마다 사찰과 불상, 탑 등 불교유적을 만나게 된다.

먼저 동남산을 살펴본다.

첫 번째 찾을 곳은 불곡이다. 이곳에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부처가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골짜기(佛谷)이다. 큰 도로변에서 골짜기를 따라 10여분 산길로 오르면 마애여래 좌상(보물 제198호)을 만난다. 3m 크기의 바위에 감실이 갖춰져 있고 그 안에 1.42m 크기의 마애불이 다소곳하게 앉아계신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 언듯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할매부처로 부르기도 한다. 혹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에 따라 선덕여왕이라고 주장한다.

경주지역에서 ‘할매부처’로도 불리는 불곡 마애불.
보물 제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상.

불곡에서 다시 내려와 도로를 따라 남으로 10여분 내려가면 탑곡이 나온다. 탑곡은 예전에 이곳에 탑이 있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도 10여분 산길을 오르면 9m 크기의 커다란 사각형 바위가 나온다. 이 바위 사방에 빼곡하게 불상과 보살상, 스님상, 비천상, 탑 등 20여개의 형상이 새겨져있어 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이라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형상을 찾다보면 부처세계에 들어간 듯하다.

바위에 새겨진 형상이 마치 천상과 지상의 정토를 구현해 놓은 듯하다. 특히 바위 북면은 사찰을 묘사해 놓았다. 여기에 새겨진 탑은 신라 최대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9층목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곡 북면에 새겨진 9층 목탑.

바위 위쪽에 삼층탑이 자리해있다. 옥개석에 내림마루 흔적이 있어 백제계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탑곡에서 다시 산을 내려와 남으로 400여m 가면 갯마을이 나온다. 옛날에 나룻배가 닿던 곳이라 한다. 마을 위에 보리사가 자리해 있다. 보리사에는 남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장엄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을 친견할 수 있다. 전체 높이 4.36m, 불상은 2.44m 크기다. 이 불상은 석조좌불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석불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보물 136호로 지정된 보리사 마애석불좌상의 장엄한 모습.

또다시 남으로 내려간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서라벌(경주)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었다.’

칠불암 가는 길이 그러하다. 사찰과 사찰이 연이어 있고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기 전에 커다란 탑들을 만나게 된다.

염불사지와 남산리 탑이다. 두 곳에 모두 쌍 탑이 놓여있는데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

염불사지에도 동·서에 삼층석탑이 자리해있다.

염불사지 동·서에 자리한 삼층석탑.

신라 때 이곳에 피리사(避里寺)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스님의 아미타불 염불 소리가 서라벌 월성 안에 가득해 360방(坊) 17만호(戶)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염불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한결같이 낭랑했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후 염불사라고 불렀다.

칠불암 오르는 산길에 들어서면 마치 무등산을 오르는 듯하다. 소나무 사이 길을 따라 급하지 않은 경사를 꼬불꼬불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암자가 나타난다. 칠불암이다.

커다란 바위 면에 삼존불이 새겨있고 그 앞쪽에 또 하나의 커다란 사각바위가 있다. 바위 사면에 부처가 조각돼 있어 삼존불과 함께 모두 7분의 부처가 조성됐다 해 칠불암이다. 이 마애불은 종교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훌륭해 국보 제312호로 지정됐다. 경주 남산에서 유일한 국보다.

깊은 산중에 자리해 있어서인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 비교적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산길을 치고 올라가면 산 능선의 높이 솟은 바위에 보물 제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반긴다. 의자에 걸터앉아 한 손에는 연꽃을 들고 한 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는 보살상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듯 생동감 있다.

불, 보살의 세계가 이러한가 보다.

산 아래에 펼쳐진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보니 아등바등 사는 세상살이가 덧없어 보인다.

시인 조지훈 씨는 ‘돌에도 피가 돈다’고 했다. 시인은 신라의 돌부처들을 보고 ‘돌 속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고 있다’고 노래했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팔에서 핏줄을 봤다.

황룡원 황룡사 9층 목탑에 담긴 뜻 재현

신라 제일의 사찰은 경주 황룡사였다.

황룡사 구층목탑을 재현한 황룡원.

당나라에서 수행하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2년(643)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귀국했다. 왕에게 부처님 사리를 봉안할 탑 건립을 청했다. 황룡사 9층목탑이다. 이 불사는 백제의 명장 아비지가 주관했다.

황룡사 9층목탑은 일본, 오월, 말갈 등 신라주변 아홉 나라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800년 가까이 흐른 지난 해, 천년고도 경주에 황룡사 9층목탑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재단법인 중도’가 보문단지 입구에 높이 68m 크기로 황룡사 9층목탑을 재현해 중도타워를 건립한 것이다.

황룡사 9층탑은 정확하게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다만 경주 남산에 9층목탑이 새겨져 있어 모습을 짐작할 따름이다. 또한 현대의 고건축 장인들은 옛 황룡사 터에 남은 주춧돌을 기준으로 3층 이상을 건립하기 어렵다고 한다. 현대 기술로 할 수 있는 것은 철골로 형태를 만들어 외형만 복원할 뿐이다.

경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등장한 황룡원 중도타워는 현대기술로 건립했다. 이렇게 중도타워가 건립된 데에는 또다른 인연이 담겨있다.

황룡원을 건립한 재단법인 중도의 대표자는 동국제강그룹의 집안이다.

동국제강 창업자는 고(故) 대원 장경호 거사이다.

장경호씨는 1975년 평생 모은 사재 30억원을 나라에 헌납했다. 당시 장씨는 “내가 소유한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을 관리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 공동의 것이다”라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무소유를 실천한 장 씨는 ‘한국의 유마거사’로 칭송되고 있다. 장 씨는 일제강점기 때 헌 가마니와 못을 모아 사업을 펼쳤다. 사업으로 바쁜 중에도 수행기간인 안거 때가 되면 사찰을 찾아 정진하곤 했다.

대원 장씨의 뜻을 받들어 후손들이 황룡사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황룡원 중도타워는 지하 1층, 지상 9층으로 교육과 문화, 전시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9층은 법당으로 이곳에서 갖는 새벽예불은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