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 미륵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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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가 꿈꾸었던 백두대간 첫 고갯길 하늘재너머 淨土세상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충북 충주 미륵리사지

2015.05.26.

미륵리 석불입상(보물 제 96호)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 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 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길을 간다. 길은 산과 들을 끼고 달린다. 충북 중원으로 향하는 오월의 길은 꽃길이다. 하얗고 풍성한 이팝나무 가로수가 유별나다.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알고 보면 마음 아픈 꽃이다. 함경도 사투리로 쌀밥을 이밥(이팝)이라 부른다. 하필 먹을 것이 떨어지는 보릿고개에 이팝나무 꽃이 무성하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옛 사람들에게 이팝나무는 아픔이었다.

오늘, 배고픔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광주의 오월은 아픔이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를 향해 달리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를 갖춘 5층 석탑이다. 탑신부는 1층 옥개석이 두 장일뿐 다른 옥개석은 한 장씩으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석 역시 형식적인 우주 모양을 모각하였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을 남기고 있다. 노반은 지나치게 커서 탑신석으로 오해받기 쉬우며 복발은 장식이 없는 반구형으로 정상에 철제찰간이 남아 있다.

그래도 길을 간다.

고대사회에도 고속도로가 있었다. 그것은 물길이다. 그중에 남한강은 이 땅에서 으뜸가는 큰길이었다.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남한강 상류. 그곳을 중원(中原·충주)이라 했다. 물자와 문화가 흐르는 중원 땅은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 모두가 탐내는 땅이었다.

그 땅의 주인은 백제와 고구려가 반복하다가 마침내 신라가 차지했다. 변방의 신라에게 남한강은 중국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옛 신라인들이 남한강으로 가기 위해서는 큰 고개를 넘어야 했다. 소백산맥이다. 영남(嶺南)은 바로 소백산맥 이남을 말한다. 죽령(竹嶺), 조령(鳥嶺·새재), 추풍령(秋風嶺)을 비롯해 수많은 고갯길이 영남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영남사람들은 고개를 넘어도 아무 고개나 넘지 않는다. 과거를 보거나 관직을 받아 고개를 넘을 때 조령으로만 넘었다. 죽령은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 떨어지듯 떨어진다고 하여 피했다. 문경새재로도 불리는 조령은 경사스런 소식(聞慶)을 듣는다고 하여 멀어도 조령 길을 택했던 것이다.

미륵리 석등(충북 유형문화재 제19호)
석불입상과 오층석탑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상·중·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소백산맥을 넘는 길 가운데 가장 먼저 열린 고갯길이 계립령(鷄立嶺·또는 한훤령)이다. 경북 문경에서 충북 충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요즘은 계립령을 하늘재로 부른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하늘재(해발 525m)이지만 그다지 높지는 않다. 미륵리에서 30-40분 정도 걸어 오르면 문경 땅과 만난다.

하늘재는 역사적으로 백두대간 첫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아달라왕 3년(서기 156년)에 이 길이 열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2000년 전 열린 하늘재 양쪽 마을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고개 남쪽 문경 땅 마을은 관음리이고, 북쪽 충주 쪽 마을은 미륵리이다.

하늘재를 넘어야 했던 이들의 원이 간절하였기에 이 고갯길은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과 미래세를 구원하는 미륵불이 상주한다고 믿고 그곳에 큰 절을 지었다.

중원 미륵리에 남아있는 절터의 공식이름은 미륵리대원사지이다. 본래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절은 폐사되고 미륵불과 석탑, 석등, 귀부, 당간지주 등 돌 유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간지주

험준한 산속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미륵리사지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리적,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확인해보기 위함이다. 그것은 노천에 우뚝 서 있는 미륵불의 신비이다.

미륵리사지의 본당은 본래 석굴이었다. 인도나 중국은 더위를 피해 거대한 돌을 파내어 바위 속에 부처님을 모셨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은 돌을 쌓아 부처님 집을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석굴로 대표적인 것이 경주 석굴암이다.

미륵리사지의 본당도 삼면을 돌로 쌓고 벽면에는 불보살을 모시는 감실을 갖췄다. 그리고 중앙에 높이 9.8m 크기의 미륵불을 조성했다.

아쉽게도 미륵리사지 석굴의 뚜껑과 입구가 무너지고 석벽과 부처님만 자리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륵불이 신비하다. 비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있는 부처님의 갓과 몸체는 검정 세월의 흔적이 있건만 얼굴부위는 새하얀 것이다. 유독 얼굴부분만 변색되지 않는 것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한다.

바람의 방향과 속도, 습도가 어우러져 이뤄진 형상이지만 숙제로 남아있다.

반면에 지역민들은 미륵부처님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특별함은 이뿐만이 아니다. 미륵리사지는 북쪽을 향해 건립된 사찰이다. 그래서 미륵불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하나 전해오고 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기로 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을 안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떠났다. 그때도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이곳에서 태자는 꿈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

관음보살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했다.

잠에서 깬 마의 태자는 함께 길을 떠난 덕주 공주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공주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두 남매는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한 뒤 고개를 넘으니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일행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성했다.

후대에 사람들은 미륵리 석불은 마의태자이고,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로 여겼다. 미륵리사지에서 북쪽으로 10여분 가면 덕주사가 나온다. 덕주사 정상 부근에 거대한 마애불이 자리해 있는데 덕주 공주의 한이 서린 덕주사 마애불이다.

이렇듯 지금도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 석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마애불은 남쪽을 바라보며 일 년에 한 번 서기를 방광해 서로 만난다고 한다.

미륵리사지는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전설이 더욱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미륵리 석굴 앞쪽에는 석등을 비롯하여 오층석탑·귀부·당간지주·불상대좌 등 석조물이 남아있다. 기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인 10세기경의 유물로 추정한다.

발굴 조사 때 ‘미륵당’, ‘명창삼년금당개개와’ 등의 명문와가 출토되어 고려 명종22년 금당의 기와를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불이 자리한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는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귀부-왼쪽 어깨에 새끼두마리가 있다

미륵리사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귀부이다. 귀부는 돌비석을 받치는 거북 돌로 이 귀부는 길이 605㎝, 높이 180㎝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다. 이 거북의 왼쪽 어깨에 두 마리의 새끼 거북이 새겨져있어 흥미롭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화문이 새겨진 당간지주와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이 찾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온달장군 공기돌

발길을 남으로 돌린다. 석벽 안에 자리한 부처님을 다시 올려다본다. 앞으로 3년간 부처님의 미소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올 9월부터 장막을 가리고 석축 보수공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보 제6호 ‘충주탑평리칠층석탑’의 의미… 통일신라 영토의 중심 좌표 ‘충주 중앙탑’

통일신라 때였다. 삼국을 통일하고 여유가 생겼다. 영토를 넓혔으니 나라의 중심이 어디일까 궁금했다.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제38대 원성왕이 걸음 잘 걷는 이들을 뽑았다. 그리고 나라의 남과 북, 땅 끝에서 한 날 한 시에 출발토록 했다. 그랬더니 이들이 중원땅 남한강변에서 만났다. 몇 차례 거듭해도 항상 중원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오늘의 충북 충주시이다.

나라의 중심자리에 탑을 세웠다.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는 중앙탑(中央塔)이다. 정식명칭은 국보 제6호 충주탑평리칠층석탑이다.

중앙탑은 높이 14.5m.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7층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917년 해체·복원 공사 때 탑신부에서 사리함이 발견됐다.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임을 증명한다. 탑 주변에서 기와편이 발굴되어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나라의 중앙이어서일까. 예로부터 탑에서 나오는 기(氣)가 세다고 한다. 지역민들은 중앙탑을 돌며 한 가지 소원을 기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신라의 중앙일 뿐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결탁한 싸움이었기에 옛 고구려 땅의 일부는 당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통일신라 북쪽의 땅 끝은 대동강이었다.

그렇다면 통일 한국의 정 중앙은 어디일까. 헌법상 북쪽 끝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이고 남쪽 끝은 제주도 마라도이다. 서쪽 끝은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 동쪽 끝은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이다.

이를 기준으로 만나는 중앙은 강원도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 48번지 배꼽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