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굴산사지-양양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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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일 관음도량 낙산사에서 맞이한 새해 상서로운 눈() 맞이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강릉 굴산사지양양 낙산사

2015.01.20.

낙산사 홍련암에서 바라 본 의상대.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을미년 새해, 해돋이를 위해 동해로 향했다. 동해에서도 해돋이 광경의 으뜸으로 낙산사 의상대만한 곳이 또 있으랴. 그러나 참으로 멀다. 남도에서 사선을 그어 가장 먼 곳, 그곳에 양양 낙산사가 자리해있다.

홍련암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참배객들.

이른 아침에 나선 길은 영동고속도로에서 복병을 만났다. 강원도 스키장으로 향하는 스키족들이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다 겨우 대관령을 지나 늦은 점심을 하고나니 넓은 동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니 허기를 면하자 강릉의 명소가 눈에 들어온다. 마침 낙산사까지 시간여유가 있어 굴산사지로 방향을 틀었다.

‘생거학산(生居鶴山)’. 영동지역에서 ‘사람이 생기가 있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학산을 꼽는다. 오늘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이다. 대관령국사성황신이자 천년강릉단오의 주신인 범일국사가 태어난 곳이다.

범일국사는 탄생부터 신비롭다. 학산에 사는 처녀가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가지로 떠서 마시고 낳은 아이였다. 처녀가 낳은 아이는 버려졌고, 학의 보살핌으로 생명을 이어 훗날 나라의 스승(國師)이 된다.

이것은 남도땅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설화다.

해수관음상.

화순에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다. 화순 군청 아래 자치샘이라는 샘이 있다. 이곳에서도 물을 길러온 처녀가 물에 떠있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낳는다. 처녀가 낳은 아이는 인근 학서도에 버려지고 학이 보살핀다. 그가 바로 송광사 2대국사인 진감국사 혜심이다.

범일국사 탄생지에는 처녀가 해를 떠서 마신 석천이 있다. 몇 해 전 여름, 수해로 우물이 메워졌으나 굴산사지 발굴과 함께 우물이 복원됐다. 우물 위 언덕에는 범일국사의 부도(보물 제85호)가 당당하게 서있다.

부도는 구름문양이 새겨진 접시모양의 받침석이 눈길을 끈다. 안정감 있게 중심을 잡은 받침석 아래 상대석에는 8마리의 사자가 온순하게 엎드려 있다. 중대석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들이 노래하며, 상대석에는 흘러가는 구름 문양이 깨달은 이가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굴산사지-당간지주

범일국사 생가 터를 가로지르는 냇가를 건너면 넓은 논 위에 두 개의 거대한 돌이 눈에 띈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 뒤편으로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대관령에 쌓인 하얀 눈이 신비롭게 펼쳐 있다. 부처님이 태어난 네팔 룸비니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설산(雪山)을 연상케 한다.

강릉에서 양양까지는 이웃집 마실가듯 한결 여유롭다. 동해바다를 끼고 달리는 7번국도의 운치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겨울밤, 낙산해수욕장 모래밭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총총하다. “그래, 내일 아침 일출은 기대해도 되겠지…” 그러나 기원은 꿈에 불과했다.

이즈음, 동해 일출시각은 아침 7시 30분경이다. 낙산 홍련암 앞 의상대에 수많은 해돋이 인파가 자리를 잡았다. 멀리 구름이 살짝 비추는 듯하더니 금세 하늘이 먹장이다. 설마 했건만, 구름사이로 나타나야할 해는 보이지 않고 세찬 바람에 눈보라까지 휘날린다.

그나마 하얀 서설(瑞雪)이 내려 금년 새해맞이는 ‘동해안 산사에서의 겨울운치’로 대신했다.

이렇듯 아쉬움을 달래는데 의상대 앞에 시비가 눈에 띈다.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좀 보아

후끈하지 않은가.

(의상대 해돋이-철운 조종현(鐵雲 趙宗玄))

해돋이의 장관은 없었지만 시를 읊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다. 철운 조종현(1904-1989)은 순천 선암사 스님이자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작가의 부친이다. 고흥에서 태어난 스님은 구한말 격동기에 선암사에 주석하며 불교와 시를 등불 삼아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시처럼 살다갔다.

종현스님의 문학적 기운을 타고난 조정래 작가는 “아버지는 언제나 높아 보였고,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엄하고도 어려운 존재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며 남도인의 올곧은 인생을 회고했다.

낙산사는 신라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사찰이다. 당나라에서 공부하던 의상대사는 인도를 다녀온 선배 현장스님에게 인도 순례기를 듣는다. 그 가운데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고 계신다는 인도의 보타낙가산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는 관세음보살 친견을 발원하며 신라 땅을 순례했다. 그리고 양양 오봉산에서 관세음보살과의 만남을 이룬다. 의상대사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수정염주를 받아 오늘의 낙산사 법당 앞 칠층석탑에 봉안했다. 그 후 오봉산의 모양새가 현장스님이 들려준 보타 낙가산과 같아 낙가산이라 명명하고 사찰은 낙산사라 했다.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굴 위에는 작은 법당을 짓고 홍련암이란 현판을 붙였다.

이렇게해서 낙산사와 홍련암은 해동제일의 관음도량이 된 것이다.

이후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4대 관음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낙산사에서 옛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은 해수관음상이다. 50대 이상 한국인치고 중고생 시절 이곳 낙산사로 수학여행을 오지 않은 이가 드물고, 해수관음상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은 이가 없다. 1975년도에 조성한 해수관음상은 높이 16m이지만 당시 동양 최대 석조관음상으로 유명세를 치뤘다. 40여년이 흘러 까까머리 학생이 머리 희끗한 어른이 돼 다시 찾아왔건만 관음보살의 미소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낙산사도 그러하다. 근래 들어 가장 큰 변화는 2005년에 있었다. 대화재로 낙가산이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바닷가 홍련암만 남기고 낙가산의 모든 것을 태웠다. 그 불길은 거대한 범종마저 녹여버릴 정도였다. 낙산사 법당에도 불이 붙었다. 엄청난 불길 속에서 스님들이 관세음보살상을 구해냈다. 다행인 것은 불상이 종이로 조성한 건칠불로 가벼워 스님들이 쉽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낙산사는 오랜 시간 복구에 혼신을 다했다. 나무를 심고 법당을 복원해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았다.

새해, 해맞이 차 떠난 동해 바닷가 낙산사는 옛 것과 새 것이 함께하는 도량이었다.

순례객들은 올해의 화두로 ‘옛 것을 되새겨 새 것을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가슴에 담고 귀향길에 올랐다.

얽히고 설킨 세상살이 ‘하룻밤의 꿈’…낙산사가 주 무대인 ‘조신의 꿈’

낙산사 원통보전과 칠층석탑

오랜 옛날부터 양양 낙산사에는 꿈 이야기 한 편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때 낙산사에 조신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하루는 절에 온 태수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 사모하게 됐다. 조신은 법당에서 관음보살님에게 하소연을 하고 그녀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조신의 간절한 발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 앞에 엎드려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며 슬피 울었다. 그러다가 지쳐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관세음보살상.

그런데, 꿈에 그녀가 나타나 “마음속으로 그대를 몹시 사랑했으나, 부모님의 명으로 부득이 출가했다가 이제는 당신과 함께 살려고 왔다”며 조신의 손을 잡았다. 너무 기뻐하던 조신은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가정을 꾸려 40년을 살았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동안 다섯 아이를 낳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십여년을 문전걸식 하며 살다가 큰 아들이 굶어 죽고, 부부마저 늙고 병들어 눕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구걸로 가족을 먹여 살리던 딸이 개에게 물려 쓰러졌다. 이러다가 식구 모두가 굶어 죽게 될 판이다. 마침내 두 부부는 아이 둘씩을 맡아 헤어지기로 했다.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려고 할 때 잠이 깼다. 깨고 보니 생시가 아니라 한바탕 꿈이었다.

법당 관음보살 앞의 등불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밤은 깊어만 갔다. 아침이 되어보니 어느새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굶어죽은 아들을 묻은 곳에 가서 땅을 파 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40여 년 세상사가 하룻밤 꿈이었다. 일생이 물거품같이 허무함을 느낀 조신은 다시는 세속 생활에 뜻을 두지 않고 정진해 조신대사가 됐다.

이 설화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소개됐고, 춘원 이광수가 장편소설 ‘꿈’으로 각색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근래에는 소설뿐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연극으로도 제작돼 삶에 집착하는 우리들의 꿈을 깨우고 있다.

‘대관령 산신이자 강릉단오제 주인’사굴산문 개산조, 범일국사

범일국사 탄생설화가 담긴 석천.

우리나라에도 천년을 이어오는 축제가 있다. 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이다.

고려사 열전에 보면 ‘935년에 강릉사람 왕순식이 왕건(태조)를 도와 신검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대관령 산신제와 관련된 최초 기록으로 천년단오라고 말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지금도 단오 때면 한 달 가량 강릉은 물론 영동지역이 들썩인다. 이런 역사성을 인정받아 강릉단오제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범일국사 부도

예로부터 강릉사람들에게 험준한 대관령은 신령스럽고 두려운 존재였다. 이곳을 다스리는 이가 바로 대관령 산신이다. 그분은 실존인물인 범일국사(梵日·810-889)이다.

해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성황’으로 추앙받는 범일국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한 곳인 ‘사굴산문’을 개산한 선지식이다.

범일국사는 대관령아래 강릉 학산에서 탄생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굴산사가 있던 곳이다.

이준엽(불교문화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