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바다 낙조 바라보며 ‘나’를 내려놓고 한 해 마무리하기 좋은 명당”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서산 간월암-부석사
2014.12.23.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세간은 연일 드라마 정국이 펼쳐지고 있다. 영화보다 더 실감나는 이야기가 난무하다. 여기에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까지 겹쳤다. 이럴 때는 만사 제쳐두고 길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그곳은 충남 서산 바닷가이다. 겨울바다….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눈 폭탄을 감수해야 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엉금엉금 눈길을 헤쳐 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위 경관이 장관이다. 이 정도면 설국(雪國)이라 할 만 하겠다. 폭설이 연출한 눈요기가 지루하다 느껴질만할 때쯤에 간월도가 나온다.
예전에 간월도는 섬이었다. 1983년, 홍성군 서부와 태안군 남쪽을 잇는 방조제가 완공됐다. 마지막 200여m를 두고 폐기된 유조선을 가라앉혀서 바닷물길을 잡았다는 ‘정주영공법’의 현장이다. 그렇게 섬은 육지가 됐다.
그래도 간월암은 여전히 섬이다. ‘섬 속의 섬’에서 ‘섬 속의’라는 수식어를 떼어냈을 뿐이다.
어찌나 작은 섬이던지…. 섬이 곧 사찰이다. 그것도 작은 암자이다.
더 신비한 것은 하루에 한 번씩 길이 열린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듯 길이 나온다. 물론 조수간만의 차로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간월암은 과거에는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로 불렀다. 물이 차는 밀물 때면 물위에 떠있는 연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화대(蓮花臺) 또는 낙가산(落伽山) 원통대(圓通臺)로도 불렀다. 바다 위에 떠있는 연꽃섬은 중생들을 정토세계로 건네주는 반야용선이었다.
수행자치고 이곳을 찾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고려 말, 무학대사도 그랬다. 어느 날 정진하던 무학대사가 둥근 보름달을 보고 홀연히 깨쳤다. 그래서 달을 보는 도량, 간월암(看月庵)이라 했고 섬 이름도 간월도로 바뀌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부침을 이어가던 간월암이 오늘의 모습을 찾은 것은 만공선사에 의해서이다. 1941년 만공선사가 무학대사가 보고 깨달았다는 달을 보기 위해 이곳에 관음보살을 다시 모셨다. 그리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천일기도를 했고, 얼마 후 광복이라는 희소식을 들었다.
오늘의 간월암은 만공스님이 중창한 법당과 산신각, 용왕전, 요사채가 자리해 있다.
기도영험이 있어서인지 법당에는 달맞이를 하는 기도객은 물론 썰물 때면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쌍둥이 부석사, 의상대사 흠모한 선묘낭자
다시 발길을 북으로 돌려 자동차로 30여분 달리면 서산 부석사를 만난다.
흔히 서산 부석사는 경북 영주 부석사와 혼동하는 이들이 많다. 대부분 부석사하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등등 영주 부석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서산에도 부석사가 있다. 그것도 영주 부석사와 창건설화도 같고 창건주도 같은 쌍둥이 부석사이다.
부석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중국 유학당시 스님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선묘낭자이다. 수행자에게 여인은 강력한 번뇌이다. 흐트러짐 없는 의상스님, 그렇다고 물러설 선묘도 아니었다. 서해의 용이 돼 스님을 호신하며 신라까지 따라온다. 그 후 의상대사는 중국에서 공부한 화엄사상을 펴기 위해 도량을 건립한다. 하필 그 땅엔 도적의 무리가 살고 있었고, 용이 된 선묘낭자는 커다란 바위가 돼 도적의 무리 위에 떠돌았다. 마침내 도적이 물러가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니 오늘의 영주 부석사이다.
다만 서산의 부석사(677년)는 백제유민이 반대했고 하늘에 떠있던 바위는 절에서 바라다보이는 바닷가에 자리해 있을 뿐이다. 선묘낭자의 사랑은 1천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부석사 법당 뒤편으로 오르니 선묘각에 선묘낭자가 화엄경을 받들고 서있다.
서산 부석사가 자리해 있는 땅은 이름도 부석면이다. 그 부석은 검은여라 하여 바위 앞에서 해마다 축제를 펼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부석사는 무학스님이 중창하고, 근대에는 한국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만공 대선사들이 수행정진하면서 면면을 이어오고 있다.
도량에 들어서면 극락전을 기점으로 요사채가 연이어 두채 달려있다. 풍수가들은 이를 와우형이라 한다. 정말 누워있는 소처럼 법당이 소의 머리가 되고, 법당 옆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소뿔이 된다. 요사채는 몸통인 셈이다.
요사채는 인중지룡(人中之龍)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목룡장(牧龍莊)’과 지혜의 검을 찾는 곳이라는 ‘심검당(尋劒堂)’ 두채이다.
심검당 아래에 우유(牛乳) 약수라고 하는 약수가 있다. 누워있는 소의 젖가슴 자리이다. 법당 건너편 개울 아래에는 소가 마실 물이 흐르는 구수통(여물통)이 있는데, 이 구수통에 물이 계속 넘치면 부석사에서는 먹거리 걱정이 없다고 한다.
우유약수와 관련해선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100여 년 전에 갑자기 부석사 약수가 끊어졌다. 스님들과 마을사람들이 부석(검은여)에 가보니 누군가 몰래 무덤을 썼던 것이다. 주인을 찾아 무덤을 파고 나니 다시 약수가 솟았다고 한다. 부석사와 부석(검은여)간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통하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부석사가 품고 있는 산은 도비산(島飛山. 351m)이다. 산이름은 ‘섬이 날아오르는 듯하다’고 하지만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서해안을 넓게 바라볼 수 있어 편안한 산이다. 서해 낙조의 으뜸으로 부석사만한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부석사는 어디에서든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래도 낙조 명당을 추천한다면 첫째는 부처님 계시는 극락전 앞이다. 두 번째는 안양루 옆에 놓여있는 흔들의자이다. 연인의 손을 잡고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감상하기에 적격이다. 하나 더 소개한다면 찻집 옆에 있는 운거루이다. 구름이 머물다 간다는 운거루는 산이 높아서라기보다 바다를 바라보는 운치가 너무 좋아 구름마저 머무는 듯하다.
이렇게 서산 땅에서 편안하게 갑오년 한해를 보낸다.
선묘낭자의 혼이 서린 부석 ‘서산 검은여’
서산 부석면 검은여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10월경 신라 의상대사를 흠모했던 당나라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검은여 제’는 마을에 있는 검은 바위에 깃든 유래와 전설을 후손에게 알리고 지역 주민의 무병장수와 풍년,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로 시작됐지만 근래들어 지역축제로 발전했다.
신라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귀국할 때 스님을 사모하던 선묘낭자도 따라 나섰다. 그러나 청정 수행자인 의상스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먼저 떠난 스님의 배를 바라보던 선묘는 황해바다에 뛰어들고만다.
신라에 돌아온 의상스님은 선묘낭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당나라와 가장 가까운 서산 도비산에 절을 창건했다. 삼국이 통일 됐지만 신라승이 옛 백제땅에 절을 짓기는 쉽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반대로 불사가 중단위기에 처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일고 검은 큰 돌이 공중에서 떠돌자 마을사람들이 놀라 흩어졌다. 황해의 용이 돼 의상스님을 옹호하던 선묘낭자가 바위로 변했던 것이다. 마침내 절이 지어지고 바위는 절에서 바라보이는 적돌만에 떨어져 검은여가 됐다고 한다.
이 검은여는 적돌만의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을사람의 눈에 항상 떠있는 돌처럼 보여 부석(浮石)이라 불리게 됐다. 그 후 절은 부석사라 불렀고 이 지역은 부석면이 됐다.
왜구 약탈로 650년 타향살이 ‘부석사 금동보살좌상’
참으로 사연많은 불상이다.
복장물을 조사해보니 1330년 부석사에서 조성된 불상으로 확인됐다. 복장물에서 나온 발원문은 “현세에 재난을 없애고 복을 누리며 내세에 아미타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스님과 신도 30여명의 발원에 의해 부석사 주존불로 조성됐다”는 내용이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좌상의 의의와 왜구에 의한 대마도로의 유출’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 관음상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문 교수에 따르면 “이 불상은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 봉안돼 있다가 1370년 무렵 왜구들이 약탈해간 유물”이라며 “왜구들에 의해 약탈돼 대마도 관음사에 기증 또는 판매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인들이 훔쳐가 대마도에서 650년 가까이 외유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얼마전 한국인들이 대마도 사찰에 있던 관음상을 훔쳐서 국내로 들여오다가 붙잡혔던 것이다.
관음상은 지난해 절도범들의 혐의가 확정돼 몰수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일본으로의 반출 경위가 판명될 때까지 일본 측에 돌려줄 수 없다는 ‘반환 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현재 관음상은 문화재청에 보관 중이며 부석사에 다시 봉안하기 위해 사찰과 지역주민들이 나서 국민청원운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