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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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世에 허물어지지 않을 명당서산대사 의발 전하는 조선불교 宗家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해남 대흥사

2015.09.29.

해탈문에서 바라본 두륜산 능선-누워있는 부처님 형상이다. 오른쪽에 머리-중앙에 가슴위에 얹은 손-왼쪽이 다리와 발.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서산대사 진영<왼쪽>과 사명대사 진영. 가허루에서 바라본 천불전.

흔히 남도를 일러 유배의 땅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쟁이나 나랏님의 미움으로 멀리 쫓겨나던 이들이 가장 많이 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50여년 전, 당대의 명문가 사대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도 남도를 향했다. 제주도로 향하는 유배길이었다.

젊어서 청나라를 다녀왔고 ‘글(文)이면 글, 글씨(書)면 글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엘리트로 시대를 이끌었으나 나라에 정변이 일어났다.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당시, 서슬 퍼런 정권의 칼날에 사형당할 운명이 된 것이다.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은 살려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길이었다.

50이 넘은 몸을 이끌고 전주-남원을 거쳐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오랜 벗 초의선사(1786-1866)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천불전 전경.

그때 절 이름은 대둔사였다. 본래 산의 형상이 완만한 것이 큰 언덕과 같아 지역사람들은 한듬산이라 했고, 사찰도 한듬절로 불렸다. 한듬절을 한자로 표기하면 대둔사(大屯寺)가 된다.

그런데 절의 일주문에 ‘두륜산 대흥사’라 쓰여 있다. 중국 곤륜산의 산세가 동으로 흘러 백두산에서 한 호흡 크게 쉬었다가, 다시 태백산-지리산을 거쳐 땅 끝에 정기를 모아놓으니 백두산의 두(頭)와 곤륜산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토속어인 한듬절(대둔사) 이름을 빼앗겼다. 대흥사(大興寺)로 바꾼 것이다. 몇 해 전, 본래 이름을 찾기 위해 절 이름을 대둔사로 환원했다. 그러나 한번 바뀐 이름을 되찾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찌됐든지, 대흥사가 자리한 산은 예로부터 명산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1천여년 전 사찰이 들어섰고, 시간이 흐르면서 큰 절로 번창하고 있으니 그 기운이 여간하지 않다.

돌로 만든 1천분의 불상.

예로부터 ‘큰 산에 큰 스님이 있다’고 한다. 산이 좋으면 도인이 많이 난다는 것이다. 이곳 대흥사에서도 서산대사 이래 13대 종사와 13대 강사가 계속 배출됐다.

지금도 일주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고즈넉한 부도전이 나오고, 옛 선지식들을 만나게 된다. 서산대사를 비롯해 13대 종사 초의선사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맥을 이어온 큰 스님들의 부도이다. 부도 형상이 각각 다른 것이 평생 수행했던 선사들의 이력을 보는 듯하여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이 배치되어 있지만 대흥사에서는 찾을 수 없다. 불법과 사찰을 지키기 위해 사방을 지키는 신장인 사천왕이 사방으로 흩어져있다. 강진 월출산(북), 해남 달마산(남), 장흥 천관산(동), 화산 선은산(서)이 바로 대흥사를 외호하는 사천왕이라고 한다.


가허루 현판(창암 이삼만), 해탈문 현판(해사 김성근)

대흥사는 가람배치도 여느 사찰과 다르다. 성격이 다른 4개의 영역으로 구분돼 있다.

크게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 영역(북원)과 표충사 영역(남원)으로 나뉜다. 북원은 침계루를 지나 대웅전과 응진전, 명부전 등의 전각과 백운전, 세진당 등 요사채가 자리한 사찰영역이다. 남원은 서산대사 영정을 봉안한 표충사와 천불전, 대광명전으로 구분돼 있다.

표충사 전경.

추사가 제주도 유배길에 어렵게 대흥사에서 초의선사와 해우했다. 아마도 침계루 누각에서 차담을 나눴나 보다. 문득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였다. 추사가 현판을 보더니 크게 흥분했다.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원교의 글씨를 걸어뒀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현판 글씨를 써주며 바꾸라고 닦달을 했다.

원교 이광사가 누구인가. 그도 당쟁에 희생돼 23년의 유배생활 가운데 완도 신지도에서 무려 16년을 지내야 했다. 억울함을 글씨로 풀었다. 마침내 동국진체라는 조선의 글씨를 완성했다. 나라 곳곳에서 원교의 글씨를 받고자 했다. 지금도 대흥사뿐 아니라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구례 쌍계사 등 곳곳에 원교의 글씨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원교는 끝내 유배지 신지도에서 육지로 나가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

추사 또한 제주도 유배지에서 무려 9년을 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글씨 쓰는 일뿐이었다. 역대 최고의 글씨로 여기는 추사체가 제주에서 완성됐다. 그래도 추사는 유배지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추사가 한양 가던 길에 대흥사에서 초의를 다시 만났다. ‘그때 글씨를 잘못 봤다’며 예전에 떼어내라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라했다.

부도전.

지금도 대흥사 대웅전에 걸려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이 원교의 글씨이고, 대웅전 오른편 세진당에 걸려있는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이 추사의 글씨이다. 원교의 글씨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군더더기 하나 없어 보이고, 추사의 글씨는 원만하고 풍성하기가 넉넉해 보인다.

대흥사 남원영역의 중심은 표충사이다. 임진란에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1520-1604)가 열반에 앞서 의발을 두륜산 대둔사에 전하라고 당부했다. 서산대사는 이곳을 일러 ‘만세에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라 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 말씀”이라고 했다. 선과 교가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뜻을 이어 대흥사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이 됐다.

제자들이 대흥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26분의 대종사와 대강사를 배출됐다. 명실상부하게 조선불교의 종가(宗家)를 이루게 된 것이다.

또한 대흥사에 모인 제자들은 진영각을 세우고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의병장 사명대사와 처영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훗날 정조 임금이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사액 사당이니 인근 지역의 현령들이 서산대사 기일에 표충사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제례는 국가제향으로, 지금도 진설도가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남아있다. 근래 들어 대흥사는 서산대제의 국가제향 복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남원영역에서 또하나 지나쳐서는 안되는 곳이 천불전이다.

순조 때(1811) 천불전에 불이 났다. 곧바로 소실된 전각을 복원하는 불사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화재에 강한 돌로 천 분의 불상을 조성키로 했다. 천 분의 부처님은 경주에서 옥돌로 6년에 걸쳐 조성했다. 경주 장진포에서 두 척의 배에 실어 불상을 옮겼다. 그런데 배 한 척이 폭풍에 밀려 일본에 닿았다. 일본 영주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났다. 영주는 부처님의 현몽에 놀라 다시 대흥사로 보냈다. 이때 일본에 다녀온 불상이 768구. 당시 일본인들이 아쉬움에 불상 어깨와 좌대 아래에 일본을 뜻하는 ‘일(日)’자를 써놓았다.

대흥사 경내에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두륜산이 마치 누워있는 부처님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에서 가슴, 손, 다리까지 그대로가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추사가 대흥사를 떠나던 날, 해탈문 앞에서 멀리 두륜산 능선을 향해 예를 올렸을 것이다.

제주 유배지에서 원교를 다시 보는 심안(心眼)을 얻었으니, 산 능선의 부처님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조 임금에서 추사·원교·창암 – 여초 글씨에 눈이 행복

사진 왼쪽부터 표충사-현판(정조대왕), 천불전 현판(원교 이광사),

대흥사는 살아있는 서예 박물관이다. 임금은 물론 조선 명필들의 다양한 글씨가 사연을 담아 자리해 있다.

대웅전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추사 김정희가 인정한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글씨이다. 이밖에도 침계루, 천불전 등 다수의 글씨가 원교 이광사 글씨이다.

또하나 눈여겨 볼만한 글씨는 천불전 앞 누각인 가허루(駕虛樓) 편액이다.

전주 명필 이삼만(1770-1847)의 글씨이다. 그는 원교의 글씨를 스승삼아 독학으로 글씨를 이뤄냈다. 천불전 현판이 스승 원교의 글씨로 자유분방한 예서체이다. 창암은 스승의 글씨가 있는 전각앞 누각 현판을 쓰게 됐다. 단정한 정자로 해서체이다. 가허루 앞에서 현판을 보고 있으면 문 안에 있는 천불전 현판과 함께 스승 앞에 단정하게 무릎 꿇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흥사는 또 하나 사연 있는 글씨가 있다.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위당 신관호(1811-1884)의 ‘표충사 보장록’이다. 예서 6폭 병풍으로 된 이 글씨도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절절하다. 위당은 추사의 수제자였다. 스승이 제주로 유배를 가자 스승 가까이에 있는 전라우수사를 자청했다. 직접 제주까지 가서 시중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회갑을 맞는 스승을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길 떠나기에 앞서 스승의 방면과 회갑축하, 그리고 장수를 기원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것이 보장록이다.

이밖에 정조 임금이 직접 쓴 표충사, 이조판서를 지낸 해사 김성근(1835-1919)의 해탈문, 백설당, 응진전 등의 현판이 눈길을 끈다.

일주문에 걸린 ‘두륜산대흥사’는 근현대 한국 서예의 대부로 불렸던 여초 김응현(1927-2007), 산문에 있는 ‘두륜산대둔사’ 편액은 전주의 명필 강암 송성용(1913-1999)의 글씨다. 또한 해탈문 안쪽에 있는 ‘선림교해만화도량’은 곡성출신 호남 서예가 운암 조용민의 글씨이다.

이밖에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 초의선사, 전강스님 등 수행자들의 글씨가 남아있어 대흥사는 가히 서예박물관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