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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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최초 가지산문 개산한 조계종 종가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절()

사찰문화기행장흥 보림사

2016.01.28.

보림사 주지 일선스님이 쌓인 눈 속에 길을 내고 있다. 뒤에 보이는 2층 전각이 대웅전이다.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해를 넘기고도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는데…. 입이 방정이라더니 지난 주말에 눈(雪) 폭탄을 맞았다. 예상치 못한 일로 순례가 미뤄졌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내리던 눈이 멈춘 뒤 하루를 기다렸지만 도로는 여전히 하얀 지뢰가 깔린 듯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조심조심 남쪽으로 향했다.

서울 광화문을 중심으로 동쪽 끝 강릉에 정동진이 있다. 북쪽 끝에 중강진이 있고, 서쪽 끝 인천 서구 오류동에 정서진이 있다. 광화문 남쪽 끝 정남진은 장흥 신동리 사금마을이라고 한다.

이달의 순례지인 보림사(寶林寺)는 따뜻한 남쪽, 장흥에 자리해 있다.

다행히 큰 길은 제설작업이 이뤄졌지만 보림사 초입인 유치교차로 삼거리부터는 눈길이어서 운전이 쉽지않았다.

1200여년 전, 희망과 들뜬 마음을 안고 이 길을 걷는 이가 있었다. 신라 경덕왕 시절 당나라를 거쳐 인도에 가서 ‘화엄경’ 80권을 짊어지고 돌아온 원표대사이다.

보림사 창건설화에는 용이 등장한다. 지금도 명부전 용마루에는 예전에 살았던 용이 살아있다.

보림사 창건설화에 따르면 원표대사가 중국 지제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홀연히 서기가 뻗쳐 빛을 따라와 보니 이곳 장흥 가지산이 지제산과 산세가 닮아 사찰을 건립(759년)했다.

창건 당시 사명은 가지사(迦智寺)였다.

가지사가 보림사로 바뀌게 된 것은 보조 체징(804-880)에 의해서이다. 체징선사가 열반하자 신라 헌강왕이 보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준 것이다.

보림사는 해동(海東), 곧 신라 땅 선종의 총 본산임을 뜻한다. 육조 혜능스님이 머물던 중국 조계산 보림사가 중국 선종의 총 본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보림사 하면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 개산지로 기억한다.

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고 이념적으로 불교의 화엄사상을 강조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화엄경’의 만법귀일(萬法歸一) 이념을 내세워 백제, 고구려 유민도 신라와 하나 돼 화엄불국토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후반기 지방 호족이 등장하면서 이념도 바뀌게 됐다. 잡다한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不立文字),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깨우친다(直指人心)는 달마대사의 선종이 성행하게 됐다. 천 년을 넘긴 나라는 늙고 병들었다. 새로운 세상을 펼칠 혁신이 요구됐던 것이다.

중국에서 마음 법(心印)을 인가받고 돌아온 선사들이 새로운 이념인 선사상을 편 것이 크게 아홉 문중이고 이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 첫 문을 세운 이는 가지산문의 초조인 도의선사이다.

오늘날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도의선사는 선덕왕 원년(784년) 당나라로 건너가 육조 혜능의 제자인 서당과 백장선사에게 인가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처음 신라에서 선사상을 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도의선사는 강원도 진전사로 들어가 법을 폈고, 제자 염거선사가 법을 이었으나 크게 선법이 일어난 것은 그 제자 체징선사에 의해서이다.

체징선사는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열고 도의-염거에 이어 3조임을 공포했다. 이후 수많은 제자들이 보림사로 모여들어 그 수가 800명에 이르렀다.

눈으로 덮인 가지산은 마치 부처님이 고행하던 설산과 같다. 보림사에 다다르니 가지산의 푸른 비자나무들이 하얀 모자를 쓴 채 숲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일주문 천장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 도량에 들어오면 깨달음이라는 여의주를 얻으리라.

일주문에서 경내를 들여다보니 사천왕문과 석탑, 석등, 대적광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천왕문-법당이 일직선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것이 어색할 듯한데 오히려 편안하다.

일주문에서 바라본 천왕문과 대적광전. 일직선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정감이 간다.

천왕문에 있는 4구의 사천왕상과 2구의 금강역사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1539)된 것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몇 해 전에 사천왕상 안에서는 경전이 쏟아져 나왔다.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은 한낱 조각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점안을 한 불상은 더 이상 조각품이 아니라 생명체이다. 불상 안에 부처님 사리나 경전 등 귀중품을 넣어 점안의식을 하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점안을 마친 사찰의 불상은 예배의 대상이 된다. 천년을 넘어 존재하는 힘이 여기에서 나온다. 불상뿐만 아니라 석탑이 그러하고 탱화가 그러하다.

보림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로 개창된 가지산문의 종찰답게 수많은 성보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2건 4점, 보물 8건 13점과 전남도지정 유형문화재가 13건 202점이나 된다. 이밖에도 성보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그야말로 보물(寶)들이 숲(林)을 이루고 있는 절(寺)이다.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이 가운데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117호)은 구산선문을 대표하는 보물이다. 표면이 거칠고 투박한 이 불상은 높이 2.52m 크기의 거대한 좌불로 시원시원한 상호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호족의 얼굴로 추정된다. 대부분 불상은 동(銅)으로 조성한다. 녹는점이 낮아 다루기가 쉽기 때문이다. 철불은 녹는 점이 높고 빨리 굳어버려 전체적으로 투박하다. 이 철불은 체징선사가 선법을 펴던 때 조성됐다. 불상 왼편 팔부위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헌안왕 3년(858)에 조성했다. 이때는 해상왕 장보고가 살해당하고 해상무역이 어려워 중국에서 동을 수입하지 못했던 듯하다.

대적광전 앞에는 쌍삼층석탑과 석등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 석조 유물은 모두 통일신라때 조성된 것으로 국보 제44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석탑과 석등이 나란히 자리해 있어 어느 유물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듯 하다. 석탑은 상륜부가 완벽하게 남아 있어 불교미술가 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왼쪽부터 국보 제44호 석등. 보조 체징선사 승탑(보물 제157호). 보조체징선사 탑비(보물 제158호).

보림사에는 대적광전뿐 아니라 또 하나의 큰 법당이 있다. 경내 동쪽에 2층으로 된 대웅전이다. 전통 사찰건축물 가운데 2층 건물은 주로 옛 백제지역 사찰 전각에 나타난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공주 마곡사 대웅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 등이 그러하다.

1200년을 이어온 보림사는 수없이 흥, 망을 반복해왔다. 최근에는 6·25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후에 건립한 것이다.

보림사 산문을 나서 광주로 오는 길이 여전히 위험한 눈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