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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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흥하면 저절로 나라가 흥해져義僧水軍 300년 이은 호국불교 근본도량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여수 흥국사

2015.09.01.

임란 이후 중건된 흥국사 대웅전(보물 396호).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작은 사진은 흥국사 경내 바다 생명체를 본뜬 다양한 돌들.

400년 전, 바다 건너 왜적이 침범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 해 8-9월경 충무공은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승려들도 전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한 달 만에 전라 경상지역에서 승려 400여 명이 모였다.

충무공은 스님들을 관군 아래에 두지 않고 승장(僧將)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세계 최초로 의승수군(義僧水軍)이 조직됐다. 충무공은 승수군의 본영을 사찰로 정하고 수행하면서 훈련받도록 했다.

여수 흥국사(興國寺)가 그곳이다.

사명 그대로 나라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사찰,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사적기에는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날 도량이니 절을 짓고 흥국사라 하라. 이 절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될 것이다”라 했다. 창건부터 국가와 사찰이 공동운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흥국사 가는 길은 여수국가산업단지를 거쳐야 한다. 1974년에 조성된 석유화학 중심의 첨단산업단지이다.

산업단지를 감싸고 있는 영취산 서쪽 초입에 흥국사가 자리해 있다. 산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흥국사 터가 명당일까. 절 입구에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수선한 공장들은 잊어버리고 산과 계곡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영취산은 독수리를 닮은 산으로 인도 영축산에서 유래됐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 정상에서 ‘법화경’을 설했다. 법을 설할 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퍼졌다. 보살과 천신도 부처님 법을 듣고 기뻐했던 것이다.

흥국사는 곳곳에 ‘법화경’ 교리를 담고 있다.

임란이후 중건된 대웅전(보물 제396호)은 큰 건물은 아니지만 짜임새가 훌륭해 조선시대 사찰전각을 대표한다.

특히 대웅전이 주목받는 것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의 형태를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야용선은 불국정토행 여객선으로 용이 이끈다. 중생의 간절한 꿈은 사바세계라는 거친 바다를 건네주는 반야용선에 승선하는 것이라 하겠다.

흥국사 대웅전 중앙에 두 마리의 용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나아가고, 법당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가 된다. 그리고 법당 아래는 그대로가 바다여서 기단과 법당 주변에 바다 게와 해초, 거북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다.

반야용선 안에는 불, 보살이 안내를 맡는다. 흥국사 대웅전 안에도 수많은 부처와 보살, 신장이 중생들을 편안케 한다.

반야용선은 물위에 떠있는 배이기에 너무 무거운 것을 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흥국사 법당앞에는 석탑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흥국사 경내에서 보물찾기하듯 거북석 등, 게, 해초, 소맷돌 용 등 바다에 사는 생명체를 찾아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일반적으로 용과 거북은 부귀와 장수를 상징한다. 옆으로 걷는 게는 다산과 겸손을 의미한다.

흥국사 대웅전에서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중앙문살의 문고리를 두손으로 잡아 이마에 대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대웅전 문고리.

예로부터 흥국사 대웅전 문고리는 한 번 잡는 것만으로도 삼악도를 벗어난다고 하여 무쇠 손잡이가 닳아졌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대웅전 옆 무사전(無私殿)도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이름이다. 이곳은 지장보살이 주관하는 세계로 사후에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분의 판관에게 심판을 받는 곳이다. 명부의 세계에도 뇌물이 있나 보다. 결코 ‘사사로운 감정이 없도록(無私) 하겠다’는 다짐이 현판에 묻어난다.

대웅전 옆에 자리한 무사전.

흥국사에는 대웅전만큼이나 특별한 전각이 또하나 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원통전.

대웅전에서 위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원통전이다. 원통(圓通)은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흥국사를 복원할 때였다. 지리산에 살던 이름 있는 목수가 흥국사를 찾았다. 그러나 대웅전은 이미 다른 목수가 일을 맡았다. 지리산 목수는 너무 원통했다. 그래도 한쪽 옆에서 혼신을 다해 전각을 하나 지었다. 원통전 이름과 관련된 옛 이야기이다.

원통전은 사방으로 마루가 놓여있다. 그 형태가 법당 밖에서도 관음보살을 향해 기도를 할 수 있고, 때로는 기도 하다가 힘들면 마루를 걸으며 정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돼있다.

임란 때 승수군의 본영이 있던 흥국사는 호국사찰을 대표한다. 그런 연유로 정유재란 때 왜군의 보복으로 도량이 소실되고 말았다.

흥국사 승수군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에도 해체하지 않고 계속 유지됐다.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는 남도의 해상안전을 담당했다.

흥국사에는 대웅전과 봉황루 사이에 법왕문(法王門)이라는 독특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법왕문은 300여 명의 승수군이 참석하는 의식이 있을 때 계급상, 또는 승가의 위계 질서상 웃어른들이 자리했던 건물로 추정한다. 승수군과 일반대중들은 아래에 있는 봉황루 누각에서 의식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전라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승수군도 해체됐다. 승수군은 임진왜란 이후 무려 300여 년간 지속됐었던 것이다.

흥국사는 2003년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을 건립했다. 지하1층, 지상1층 규모의 전시관에는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이 착용했던 옷과 무기, 괘불, 현판 등 50여 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흥국사는 인조 2년(1624) 계특 대사를 중심으로 중창불사를 단행했다.

오늘날 전각은 대부분 이 무렵에 중건됐다. 대웅전을 비롯해 팔상전, 불조전, 응진당 등 전각과 보물 578호 대웅전후불탱, 보물 1331호 노사나불괘불탱, 보물 1332호 수월관음도, 보물 1333호 십육나한도 등이 전해진다. 흥국사에는 올해 보물 제1862호로 지정된 대웅전 관음벽화까지 무려 10점의 보물이 산재해 있다.

흥국사 복원에는 승수군의 역할이 컸다. 당시 승수군은 순천 송광사 대웅전도 함께 중창했다.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중창했으니 송광사 불사에 승수군이 적극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광사 대웅전은 한국전쟁 때 또다시 불타고 말았다. 그래서 옛 송광사 대웅전을 보려면 흥국사로 가야한다. 이래저래 흥국사에 갈 이유가 많다.

흥국사를 나서는 길에 산문 밖 홍교(보물 563호)를 건넌다. 1839년 승수군이 축조한 홍교는 높이 5.5m, 너비 3.45m, 길이가 40m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839년 승수군이 축조한 홍교(보물 563호)는 높이 5.5m, 너비 3.45m, 길이가 40m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 돌다리는 들어서고 나가는 양끝이 살짝 굽어있다.

남북대치 상태인 한반도, 자존심만 내세워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흥국사 홍교마냥 양쪽에서 서로 조금씩 굽히는 지혜가 아쉽다.

거북선은 사찰탑비 귀부에서 힌트, 흥국사 자운스님이 설계

거북선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지리산 연곡사 승탑.

지난해 여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해전의 수훈갑 가운데 하나는 거북선이다.

의승 수군의 총본산인 여수 흥국사와 인근지역에서는 ‘거북선은 자운대사가 충무공에게 제안해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거북선의 근원은 흥국사 본사인 구례 화엄사와 지리산 연곡사 창건설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건주 연기조사는 천축국 인도에서 연(?)을 타고 지리산에 와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한다.

이때 연기조사가 타고 온 연은 육지와 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통에는 날개가 달린 거북이다. 특이하게도 연곡사 승탑비 귀부에는 날개가 달려있어 설화에 등장하는 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임란 당시 충무공 옆에는 항상 의승수군 총대장인 자운스님이 부장으로 활약하며 함께 싸움에 임했다.

하루는 자운스님이 연기조사가 타고 온 연을 바다에 띄우면 어떠할까 생각했다.

본래 일본의 수군은 대마도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해적(왜구)들로 바닷사람들은 용을 상서롭게 여긴다. 자운스님은 ‘조선 수군의 배를 용의 형상으로 만들면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투의욕을 잃어 싸우기보다 도망가기에 급급할 것’이라며 충무공에게 거북선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흥국사 주지 명선스님은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가 ‘스님들이 거북선 설계에 직접 참여했다’고 기록한 일기가 일본 해군성 박물관에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역사적으로 거북선은 조선 태종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귀선(龜船)으로 불리던 거북선은 시대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랐다.

임란당시 전라좌수영 소속 거북선과 경상우수영의 거북선은 용 머리가 약간 달랐다고 한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좀 더 불교의 호법적 의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자운스님이 활약한 여수 흥국사는 전라좌수영 지역이므로, 스님이 거북선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는 신빙성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