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문화기행] 아쇼카순례단–해설이 있는 사찰 순례 순천 송광사(松廣寺)
열여덟 분 國師 나온다는 수행명가…깨침 향해 걷는 ‘구도의 길’
2017.03.16.
봄,
바람이 분다. 이맘 때가 되면 괜시리 마음이 들뜬다. 꽃향기 담은 바람이 콧구멍을 간지럽힌다. 어찌 가만히 앉아만 있을쏜가. 어디라도 나서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문턱만 건너도 좋은때다.
화순에서 주암 호반길을 따라가면 계곡마다 유서 깊은 사찰이 연이어 나온다. 유마산 유마사, 천봉산 대원사를 지나 더 나아가면 조계산 송광사다.
2년 전 송광사 초입에 거대한 산문이 들어섰다. 편하게 산사를 찾았건만 왠지 위압감이 밀려온다. 어정쩡하게 몸집만 커서 정겹지 않다.
다행히 청량각-일주문-천왕문으로 이어지는 진입로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어 헝클어진 마음을 달래준다.
송광사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많다.
먼저 승보종찰 송광사다. 불교의 근간인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고려말 흐트러져가는 불교를 바로세우고자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중심으로 정혜결사를 단행했다. 이후 조선초 왕사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보조국사의 법맥을 이은 ‘나라의 스승’ 국사 16분을 배출해 명실상부한 승보종찰로 불린다.
또 하나는 조계총림 송광사다. 총림(叢林·vindhyavana)은 수행자가 화합해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는 뜻을 담고 있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갖춰야한다. 전국에 총림으로 지정된 사찰이 9개 뿐이니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송광사는 수행을 강조하는 한국의 대표사찰이다. 송광사의 수행은 목우가풍(牧牛家風)으로 요약된다. 목우는 보조국사의 호인 목우자(牧牛子)에서 유래됐다. 불교에서 마음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10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심우도가 있다. 목우가풍은 소치는 목동처럼 깨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것이다.
송광사 곳곳에는 소치는 목동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주문 앞에 스님들의 행적을 새긴 탑비림이 있다. 탑비림에 올라가는 계단 양쪽 소맷돌이 유별나다. 비석을 쪼개어 놓은 것이다. 송광사에 내려오는 사연은 이러하다. 이 비석은 조선말 마지막 암행어사의 선정비라고 한다. 비문에는 암행어사가 구구절절 좋은 일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탐관오리였다고 한다. 어쩌면 선정을 베푼 이는 비석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어지간히 송광사 대중과 지역민들을 힘들게 했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스님들이 선정비를 뽀개서 스님들 부도에 오르는 계단에 놓았다. 후인들이 두고두고 밟고 다니게 한 것이다. 오는 5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대선 후보자와 정치인들이 이 계단에 오르길 권한다. 악한 정치의 응보는 꼭 받는다는 것을 가슴깊이 새길 것이다.
송광사 법당에 들어서려면 조계천을 건너야 한다. 돌다리가 있는데 능허교다. 다리 아래에는 공하라는 용이 있다. 특별히 능허교 공하는 엽전 세 닢을 철사에 꿰어 물고 있다. 옛날 능허교 돌다리가 무너져서 불사를 했다. 다리를 완성하고 보니 옆전 세 닢이 남았다. 남은 돈은 다른 불사에 쓸 수도 있지만 다리에 매달아 놓기로 했다. 언젠가 다리가 부서지면 수리하는데 쓰도록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재물을 용도 이외에 쓰는 것을 경계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송광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송광사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말 체징스님이 창건하면서다. 창건 당시에는 길상사였다. 그후 1200년경 보조국사가 수행결사인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기고 송광사라 했다. 이후 16명의 국사를 연이어 배출했다.
송광(松廣)이란 이름에도 숨은 뜻이 있다. ‘송(松)’자를 나누어보면 열여덟 분의 귀한분 ‘十八(木)+公’이 된다.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편다는 뜻이다. 18분의 큰스님들이 나와 불법을 크게 펴는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16분의 국사가 출현했으니 세상 사람들은 앞으로 나올 2분의 국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조계총림은 대중스님들의 수행, 정진이 여법하기로 잘 알려져 있다.
송광사는 6·25한국전쟁 당시에도 화재와 전란 속에 수많은 전각들이 소실돼 다시 중건했다.
그럼에도 송광사는 전국 사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제43호), 국사전(국보 제56호)을 비롯해 보물 10점 등 총 6천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세상에는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은 것이 있다. 능견난사(能見難思)라 한다. 송광사에도 능견난사(유형문화재 19호)가 있다. 보조국사가 중국 금나라에서 가져온 청동발우다. 금명 보정선사가 편찬한 백열록(栢悅錄)에 의하면, 500여개가 한꺼번에 포개지는데, 이 때 겉 그릇은 안 그릇을 속으로 겹쳐 들이지만 그보다 크지 않고, 안 그릇은 속으로 들어가 밖의 것과 합해지지만 그보다 작지 않을 정도로 그 크기가 서로 차이나지 않으며 안팎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니 형제 관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대소 관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라 했다. 마지막 암행어사를 비롯해 지방 관료들이 대부분 빼앗아가고 지금은 30여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더욱 신기한 일이 있다.
일주문 옆에 앙상한 나무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다. 보조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였는데 이곳에 꽂아 나무로 자라나게 됐다. 헌데 보조국사가 열반하던 날 이 나무도 함께 시들해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찾을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있다. 8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썩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해 있다.
송광사 전각 가운데 주목할 건물은 관음전이다. 1903년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축성전이었다.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왕실의 원당이었다. 1957년 관음전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관음보살을 성수전으로 옮기고 관음전으로 현판을 바꿨다. 현재 관음전의 법당내부는 임금이 앉아서 정치를 보는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케 한다. 관음보살 뒷면에 임금의 자리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있다. 벽면에는 신하들이 임금을 향해 읍하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200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하면서 복장 속에서 유물이 나왔다.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 셋째 아들 경안군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품이었다.
병자호란에서 패하고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의 심양에서 와신상담하던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 인조의 질투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셋이나 있건만 인조는 소현세자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비참한 삶을 마쳐야했다.
그런데 희유하게도 송광사에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 고종을 쫓아내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연의 고리는 이렇게도 이어지나 보다.
옛부터 송광사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세 가지가(三無) 없다. 석탑, 주련, 풍경이다. 송광사는 지형적으로 연꽃의 중심이기에 무거운 석탑이나 석등을 세우지 않았다. 또한 섣부른 알음알이를 경계해 주련을 새기지 않았다. 그리고 수행에 거추장스런 소리조차 만들지 않고자 풍경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꽃바람 따라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목우가풍의 수행자들이 품어내는 향내에 취해 돌아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감로암 장원급제 원감국사 창건한 기도도량
일반적으로 산에 있는 사찰은 대중이 모여사는 큰 절이 있고, 더 깊은 산중에 작은 암자가 있기 마련이다. 송광사에는 16국사의 부도와 탑비가 자리한 곳마다 암자가 있었다.
몇 해 전, 송광사와 순천시는 16국사들의 수행향기를 따라 걷는 ‘국사로’를 단장하고 일반에 공개했다.
그 가운데 불일암-광원암으로 이어지는 제1구간의 첫 암자가 감로암이다.
감로암은 제6세 원감국사 충지(1226-1293) 스님이 창건했다.
원감국사는 장흥 출신으로 속성은 장흥 위씨다. 스님은 29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가했다. 출가 전에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벼슬길에 나서 10여 년간 원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출가 후 스님은 시문에 능해 수많은 선시를 남겼다.
근래 들어 감로암은 조계총림 염불원으로 지정되면서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원감국사의 장원급제가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로암에는 귀부와 탑비가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는 원감국사 보명탑이 남아 있다. 특이하게 비석을 짊어지고 있는 거북이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있어 눈길을 끈다. 거북이 바라보는 곳은 앞산에 자리한 원감국사 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