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 옥천사-문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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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소식 마중하러 나갔더니 산과 바다가 나도 봄이라 하네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문수암, 화랑이 마음공부 하던 수련터

2015.03.24.

문수암에서 바라보이는 한려수도.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완연한 봄이다.

여기저기 꽃 소식에 마음마저 설레게 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개나리는 3월 15일 제주 서귀포에서 꽃을 피웠고, 보름후인 4월 2일께 중부지방이 노란색으로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봄의 속도는 시속 1㎞, 어린아이 걸음걸이 정도이다.

행여, 아장아장 걸어오는 꽃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해서 순례단의 발길을 남쪽으로 향했다.

이번 순례지는 경남 고성에 자리한 연화산 옥천사와 무이산 문수암이다.

고성은 본래 6가야 가운데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지였다. 신라는 562년 금관가야를 시작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시켰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초창기는 여전히 혼란했다. 정신적 통일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대 사상가인 원효와 의상대사이다.

의상 스님은 당시 문화 선진국인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가 공부한 것은 불교 화엄학이다. 화엄종지는 ‘1만 가지 이치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삼국이 경쟁을 했지만 결국 하나가 된다는 사상은 신라의 통일을 이념적으로 합리화해 사상통일을 시키기에 충분했다.

통일신라는 의상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옛 고구려, 백제, 가야의 중심지와 저항이 심했던 곳에 화엄종지를 바탕으로 하는 사찰을 세웠다. 구례 화엄사, 합천 해인사, 공주 갑사, 전주 국신사, 고성 옥천사 등 이른바 화엄 10찰이다.

옥천사도 나라 잃은 가야인들의 기운이 서린 곳에 건립한 도량이다.

공식적인 창건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창건주는 의상대사이다. 절 이름은 대웅전 옆에서 솟는 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풍수가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사찰풍수에서 첫째는 물이라 하겠다. 아무리 산세가 좋아도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다. 사찰을 건립할 당시에 물이 넘쳤다 하더라도 중간에 물이 끊기면 폐찰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찰과 물은 하나로 본다.

노자는 인생을 물처럼 살라고 역설한다.

물은 유연하다. 그릇의 모양새가 달라도 물은 본질을 변치 않으면서 그릇에 순응한다.

또한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지만 물은 마침내 바다에 도달한다. 자신을 낮춰야 도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옥천 옆에 주인되는 부처님 집이 자리해 있다. 현판이 대웅전이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야 하건만 아미타불이 주불로 자리해있다. 오랜 세월 흐름 속에 화재와 전쟁으로 인한 옥천사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

옥천사-명부전 용마루와 앞산 능선의 비율이 환상적이다.(좌) 옥천사 자방루 보에 그려진 연꽃.

옥천사에는 주불이 모셔진 대웅전보다 더 큰 건물이 있다. 절 입구에 자리한 자방루(滋芳樓·유형문화재 제53호)이다.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자방루는 이름만큼이나 수많은 꽃 문양이 그려져있어 화사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여느 사찰의 누각과 다르다. 사찰의 동선이 대부분 누각아래로 진입하도록 되어있는데, 자방루는 좌우에 작은 문을 두고 성채처럼 단단하게 전면을 막고 있다.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자리한 옥천사는 임진왜란이후 승병이 상주했다. 옥천사는 도를 닦는 수행처이자 동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채로 활용했던 것이다.

옥천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사방에 전각들이 산재해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전각은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다.

옥천사-1칸짜리 작은 전각. 독성각(사진 왼쪽)과 산령각.

특히 명부전 뒤에 자리한 독성각과 산령각이 눈길을 끈다. 이들 전각은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이다. 작아도 너무 작아 한 사람 겨우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찰건물은 규모가 작아도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춰야 한다. 따라서 저렇게 작은 건물을 지은 것은 꼭 재정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사찰이 자리한 산세와 전각의 조화 때문이다.

독성각과 산령각 사이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니 산세와 전각의 짜임새를 엿볼 수 있다. 앞에 자리한 명부전 용마루와 앞산 능선의 비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처럼 사찰은 전각을 지을 때 주위 산 능선과의 조화를 우선한다. 재정이 좋다고 무조건 건물을 크게 짓지 않는다.

그래서 옛 스님들이 말하기를 건물 지붕선이 산의 능선보다 크면 다툼이 많다고 한다. 지붕선이 능선보다 작으면 수행자들의 마음이 옹졸해져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옥천사에서 30여분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땅 끝을 만난다. 한려수도와 맞닿은 그곳에 무이산이 솟아있다. 굽이굽이 산길을 몇 차례 치고 올라서면 산 정상부근 바위벽에 착 달라붙은 듯한 사찰이 나온다. 문수암이다. 경상지역에서 남해 보리암, 청도 사리암과 더불어 3대 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다.

문수암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때는 옥천사보다 늦은 신라 성덕왕 5년(706)이다.

의상대사가 남해 금산 보리암으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러 가던 길에 무이산 아래 무선리의 민가에 묵게 됐다. 그날 밤,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아침에 만나는 걸인을 따라 가라고 했다. 날이 새자, 의상대사는 걸인을 따라 무이산으로 올라갔다. 산에 올라 보니 눈앞에 수많은 섬들이 떠 있고, 동서남북으로 웅장한 대(臺)가 있어 마치 강원도 오대산의 중대(中臺)를 연상케 했다. 이 때 한 걸인이 또 나타나더니 두 걸인은 서로 손을 잡고 바위 틈새로 사라져버렸다. 의상이 석벽 사이를 살펴보았지만 걸인은 보이지 않고 천연의 바위에 문수, 보현보살상이 자리해 있었다. 꿈속의 노승은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은 문수와 보현보살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의상대사는 “이 곳은 족히 사자를 길들일만한 곳이다”며 수행도량을 건립했다. 바로 문수암이다. 지금도 석벽 사이로 보이는 문수, 보현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불교에서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은 실천을 뜻한다. 동물로 비유하면 지혜는 동물의 왕 사자이고, 실천은 힘센 코끼리이다. 그래서 사자 위에 앉아있는 보살은 문수보살이고,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살은 보현보살이다. 지혜와 실천은 한 쌍이 되어야 한다. 실천 없는 지혜와 지혜 없는 실천은 도리어 삿되게 흐를 수 있다. 진리를 하나라도 알았으면 실천해야 하는 것이 수행이라 하겠다.

문수암이 자리한 무이산은 삼국 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서 화랑들의 수련장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화랑도 전성시대에 국선 화랑들이 이 산에서 심신을 연마했다고 전해진다.

산세가 수려해서인지 문수암에 오르면 사찰참배보다 먼저 앞에 펼쳐진 한려수도의 절경에 마음을 뺏긴다. 바둑돌을 뿌린 듯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로 피어나는 아지랑이가 ‘나도 봄이다’며 손짓한다.

문수암 전망대에서 산천을 바라보니 마음이 꿈틀거린다. 봄기운이다.

남녘 땅 다도해 암자에서 맞이한 봄, 그것은 깊은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이었다.

옥천(玉泉), 성인의 반열에 오른 샘

옥천사 옥천각 전경과 내부 모습.

옥천사(玉泉寺). 말 그대로 구슬처럼 맑은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샘의 역사는 절이 창건된 1400여년 전부터 있었다.

옥천사가 자리한 연화산의 옛 이름은 비슬산(毘瑟山)이었다. 비슬은 범어 비슈누(Vishnu)의 한자 음역이다. 비슈누는 본래 태양신이었다. 인도문화의 근원인 리그베다에는 비슈누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세 걸음으로 우주를 건너고 그가 사는 곳은 높은 하늘이며 감로의 샘이 솟아나서 제신 및 조령들이 그 속에 머물러 향락을 누린다.”

비슈누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우주지상신으로 신격이 격상됐고, 불교에서는 범천의 모태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천지 창조신인 비슬천이 살고 있는 산에는 감로수가 나오는 옥천이 있어야 하고 연꽃이 피어나야 한다.

고성 연화산이 그러하다. 천개의 연잎이 에워싸고 있는 듯 산이 솟아있고, 신묘하게도 옥천이 샘솟고 있다.

옥천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조선시대 간혹 수맥이 막힐 때는 산중의 계행 청정한 스님이 기도를 올렸고,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곤 했다고 한다.

한반도는 대부분 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지만 옥천은 서쪽에서 솟아나 동쪽으로 흐른다(西出東流). 예부터 병을 고치는 감로수(甘露水)로 유명세를 탔고, 지금도 한국의 100대 명수(名水)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연화산에는 암수 옥천이 있다고 전해온다. 산속의 물 무덤이 아래에 있는 샘은 숫샘이고, 옥천사의 옥천은 암샘이라고 한다.

옥천은 사시사철 수량과 수온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옥천의 물을 장기간 마시면 위장병, 피부병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1948년에 샘 위에 집을 짓고 옥천각이란 현판을 달았다.

본래 사찰에서 불,보살을 모신 건물을 전(殿)이라 하고, 산신이나 독성 등 성인(聖人)을 모신 건물을 각(閣)이라 부른다.

옥천사 샘물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최상의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