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보탑사-안성 칠장사-안성 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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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재수생박문수 칠장사서 기도하다 꿈에 나타난 시제로 급제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2014.11.25.

올해는 182년만에 맞는 9월 윤달이 있는 해이다. 윤달은 양력과 음력 사이에 생긴 시간차를 맞추기 위해 대략 4년에 한 번씩 한 달을 더 둔다. 달(月)이 주는 ‘시간선물’인 셈이다.

윤달에는 인간세상을 감시하던 신들도 하늘에 올라가고 없다. 덤으로 얻은 시간이기에 우리 선조들은 윤달을 잘 활용했다.

윤달은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는 달’이라며 함부로 손대면 동티 나는 일을 했다. 윤달에 집을 고치고 산소를 이장하거나 수의를 준비하는 것이 이런 연유에서이다.

불가(佛家)에서 윤달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이다. 기도하면 감응하는 달로 여겨 공덕을 짓는 풍습이 있었다. 생전예수재와 삼사순례가 그것이다.

윤달을 맞아 지난 7일, 아쇼카 순례단은 충청도 진천 보탑사와 안성 칠장사, 청룡사로 삼사순례를 떠났다.

진천 보탑사

보탑사 3층 난간에서 바라 본 보련산.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이 연꽃잎을 겹겹이 포개 놓은 듯 하다.

예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 했다. 본래는 ‘살아서는 진천에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천지역에서는 ‘진천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고 있다.

진천읍 연곡리 보련산에 자리한 보탑사 본당은 부처님 집처럼 보이지만 엄격히 말하면 활동공간인 전각이 아니라 탑이다. 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이다.

진천 보탑사.

보탑사가 창건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1992년 불사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본래 이곳은 오래전부터 거대한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보탑사 주 건물은 3층목탑이다. 목탑으로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 높이 42.7m에 이른다. 금세기 최고의 대목들이 참여해 쇠못을 쓰지 않고 짜맞추기로 지은 최대건물이다.

1층은 금당(金堂)으로 심주를 중심으로 동(약사여래불) 남(석가모니불) 서(아미타불), 북(비로자나불)으로 돌아가면서 사방불이 모셔져있다. 2층 법보전(法寶殿)에는 경전을 두었고, 3층 미륵전(彌勒殿)에는 다음생에 오실 부처님이 상주해 있다.

보탑사 순례의 꽃은 목탑 삼층난간을 도는 탑돌이이다. 아파트 14층 높이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의 능선이 마치 연꽃잎 같다. 누구라도 탑돌이를 하다보면 탑이 연잎에 쌓인 연밥 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탑사 탑은 부처님의 진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길 기원함과 동시에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보련산 보탑사 통일대탑’이라고 불린다.

안성 칠장사

어사 박문수도 과거 재수생이었다. 몇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해 과거를 보러 나선 박문수는 칠장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날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한이 나타나 과거 시제를 알려줘 급제했다고 한다.

이처럼 안성시 죽산면에 자리한 칠장사는 나한기도로 잘 알려진 천년고찰이다.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고려 현종 5년(1014년) 혜소국사가 왕명을 받고 크게 중창했다.

칠현산 속에 자리 잡은 칠장사는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과 보물 제 1256호 삼불회괘불탱, 그리고 혜소국사비, 인목대비 친필 칠언시 등 수많은 문화재가 남아있다.

칠장사 혜소국사비-가토 기요마사의 칼자국이 남아있다.

칠장사의 나한설화는 ‘7명의 나한’과 혜소국사의 인연에서부터 출발한다.

본래 칠장사의 나한은 7명의 도적이었다고 한다. 혜소국사를 만나 제자가 되었고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칠장사 나한전 옆에는 혜소국사비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지나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앞에 어느 노승이 나타나 ‘당장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화가 난 가토 기요마사가 노승을 칼로 내리쳤는데 노승은 간 데 없고 비석만 갈라지면서 피가 흘렀다. 혜소국사가 화현한 것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지금도 혜소국사 비석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쪼개진 흔적이 남아있다.

안성 청룡사

청룡사 대웅전 앞에서 아쇼카 순례단 기념 사진.

고려 원종(1265년)때 명본국사가 대장암으로 창건하고 공민왕(1364년)때 나옹선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하루 묵게 되었다. 과연 꽃비가 내리고 구름사이로 청룡이 오르내리기에 절을 크게 중창하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청룡사라 명명했다.

청룡사가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여겨지는 것은 남사당(男寺黨)패의 하나인 바우덕이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남사당은 본래 1900년대 초, 민초들 사이에 생겨난 민중예인집단으로 남자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청룡사 남사당의 대표인 꼭지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우덕이로 경복궁 복원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원군이 추진한 경복궁 중건은 대규모 사업으로 사기가 떨어진 공역자와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청룡사 대웅전 측면 벽-있는그대로 사용한 나무기둥이 보는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준다.

바우덕이 패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일꾼들이 등짐도 지지 않고 뛰어다니며 ‘얼수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고 한다.

경복궁 공사가 끝나고 남사당은 전국을 돌았다.

그러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청룡사로 찾아들었다.

남사당패는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청룡사 안쪽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은 있는 그대로가 모두 보물이다. 특히 대웅전 남쪽 벽면은 자연미를 살린 기둥이 유명하다. 다듬지 않고 그저 껍질 만 벗기고 나뭇결을 있는 그대로 사용한 벽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바우덕이의 소고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불교문화 해설사

보탑사, 불가사의 수박. 7개월 동안 상하지 않고 싱싱

보탑사 1층 법당 동쪽에는 약사여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중생들의 온갖 병고를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원을 세운 부처님이다. 그런데 보탑사 약사불 앞에는 수박 50-60덩이가 자리해있다.

지금이야 계절에 관계없이 수박 맛을 볼 수 있지만, 보탑사 수박은 특별하다.

지난 봄, 음력 사월 초파일에 공양올린 수박이기 때문이다. 보탑사는 해마다 부처님오신날 수박을 올리고 그해 동짓날(12월 22일) 나눠먹는다. 신비하게도 봄부터 여름장마를 거쳐 가을, 겨울까지 무려 7개월 보름동안 불전에 올려져있지만 상하지 않는다.

이제 보탑사 수박은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타고 있다. 동짓날이면 이 수박을 먹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부처님 전에 올려 수많은 이들이 기도했으니 영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년이 넘는 세월에도 수박이 상하지 않는 것은 온도와 습도, 통풍이 맞기 때문이고, 그것은 목조건물의 신비라 하겠다.

칠장사에 전해져 오는 恨 많은 인목대비가 쓴 漢詩

이 땅에 살다간 여인치고 어찌 한(恨)을 안고 살지 않은 이가 있으랴. 그래도 인목대비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도 드물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나이 51세 때 19살의 인목대비가 왕비가 되었다. 그때 세자였던 광해군은 29세로 대비보다 10살이나 위였다.

인목대비가 왕자를 낳으니 그가 영창대군이다. 선조의 14 왕자 가운데 유일한 적통왕자이다. 그러나 선조의 뒤를 이은 왕은 광해군이었다. 권력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로 유배되었고, 불 때는 방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죽고 만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던 인목대비, 그녀도 10여 년 간 서궁에 갇혀 살며 죽은 목숨보다 힘든 삶을 이어갔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세상은 바뀌었다.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목대비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대비는 안성 칠장사를 원찰로 정해 영창대군과 친정 부모, 몰살당한 가족들의 명복을 빌었다.

글씨에 능한 인목대비가 말년에 고단한 삶을 돌아보며 쓴 한 시 친필 족자 1축이 칠장사에 전해오고 있다.

늙은 소는 힘을 다한 지 이미 여러 해 (老牛用力已多年)

목이 찢기고 가죽 뚫어져 그저 달디 단 잠뿐이로구나 (領破皮穿只愛眠)

밭갈이는 이미 끝나고 봄비는 충분히 오는데 (犁已休春雨足)

주인은 어이하여 또 채찍을 드는가 (主人何苦又加鞭)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