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총림 방장 현봉 스님 하안거 해제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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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 하안거 해제 법어

오늘 하안거 해제를 하고 조계산을 나서면 동서남북 대중들은 모두가 자기 갈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석달 전에 이 여름 결제를 위해 이 산문을 찾아올 때 발끝을 바라보며 무겁게 걸어오던 걸음과 오늘 해제하고 이 산문을 나서면서 먼 산을 바라보며 홀가분하게 걸어가는 걸음의 기분은 사뭇 다를 것이다.

사리불(舍利弗)이 어느 날 성(城)으로 들어가는데 월상녀(月上女)가 성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리불이 말하기를 “어디를 가는가?” 하니, 월상녀가 대답하기를 “사리불 존자님처럼 그렇게 갑니다.” 하였다.

사리불이 다시 묻기를 “나는 지금 성으로 들어가고 그대는 성에서 나오고 있는데 어째서 나처럼 간다고 하는가?” 하니, 월상녀가 말하기를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머무십니까?” 하므로, 사리불이“부처님 제자들은 마땅히 큰 열반에 머물고 있다.” 하였다.

이에 월상녀가 “부처님 제자들이 이미 그렇게 머물고 있으므로 나도 사리불존자처럼 그렇게 갑니다” 하였다.

오늘 해제를 하고 산문을 나서는 대중들도 그렇게 가시기 바란다.

그리고 오늘은 우란분절이기도 하여 선망부모와 조상들의 영가들을 나고 죽음의 괴로운 윤회에서 해탈시키기 위해 천도재를 올리는 날이다.

우란분절의 천도재란 여름안거 동안 수행한 공력으로 영가들에게 생사고락이 본래 텅 빈 것임을 돌이켜 깨닫도록 법공양 즉 진리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고 죽음이 없는 큰 열반에 머물고 있듯이, 영가들이 천상에 태어나 천상락을 즐기거나 지옥이나 아수라세계에 떨어지고 중음(中陰)을 떠돌면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런 현상들이 모두 꿈같고 그림자같이 본래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임을 깨닫도록 염원하면서 대승경전을 독경하거나 설법하며 법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우리들이 모니터 화면 앞에 앉아 거기에 연출되는 희로애락의 갖가지 드라마들이 한갓 환상(幻像)임을 깨닫는다면 거기에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그 환상이 실체인 줄로 착각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거기에 집착하여 끌려 빠져드는 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지만, 그 헛된 영상들을 없애기 위해 모니터의 전원(電源)을 단절시키거나 모니터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단멸(斷滅)에 떨어지고 마는 짓이다.

일체 유위법(有爲法)이 실체가 없는 몽환(夢幻)임을 깨달은 가운데 거기에 흔들리거나 얽매임 없이 선순환의 연기를 즐기는 것이 바로 열반락(涅槃樂)이다.

어느 드라마나 소설이 설사 허구(虛構)일지라도 희극이든 비극이든 거기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해야 뛰어난 명작의 예술품이 될 것이며, 픽션일지라도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결국 어처구니없는 졸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백장(百丈)선사 회상에 법문을 하는데 어느 노인이 매일 와서 들었는데, 어느 날 그 노인이 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기에 백장선사가 묻기를 “가지 않고 서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과거의 가섭부처님 때부터 이 산에 살면서 수행하였습니다. 언젠가 어느 학인이 묻기를 ‘크게 수행한 도인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큰 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하고 대답하여 그 과보로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는지 큰스님께서 자비로 한 말씀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백장선사가 “그러면 다시 그렇게 물어보라.” 하니, 노인이 “수행을 잘하는 큰 도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하므로, 선사가 대답하기를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 하였다. 그 말끝에 노인이 크게 깨닫고 “제가 이제 여우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이 산 뒤에 벗어둔 시체가 있으니 죽은 스님을 화장하듯이 해 주십시오.” 하였다. 선사가 유나(維那)를 시켜 종을 쳐서 대중에게 알리고 공양이 끝난 뒤에 화장을 해주었다.

인과(因果)는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수행자가 인과법을 모르면 가사를 두르고 있는 들여우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이 연기법은 바로 그 실체가 공성(空性)이며, 그 공성은 연기(緣起)로 드러나면서 펼쳐지고 거두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도 몸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그렇게 인과의 연기 속에 오가는 것이다.

그것을 서산대사는 시적인 표현으로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 거수명월거(去隨明月去). 올 때는 실체 없는 흰 구름처럼 왔다가, 갈 때는 자취 없는 달빛처럼 떠나간다.”라고 하였다.

오늘 해제하는 대중들이나 해탈하는 영가들도 그렇게 오고 가기를 바랍니다.

幻化色身卽法身
無明路上無生路
曹溪山門開無防
佛與衆生共行道

환화 같은 몸뚱이가 그대로 법신이며
생사의 길 위에 열반의 길이 있네.
조계의 산문은 막힘없이 열려 있어
부처와 중생들이 함께 가는 길이로다.

법보신문=신용훈 호남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