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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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기행] 아쇼카순례단해설이 있는 사찰 순례 경주 남산(2)

깨지고 떨어져도 세월의 흔적이 정겹다

2017.06.22.

배동 석조여래 삼존입상.

경주답사를 일러 아름다운 시간여행이라 한다.

1천년 전, 서라벌에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남산은 특별함이 더하다. 신라의 건국설화가 담겨있는 나정(蘿井)과 신라의 종막을 알리는 포석정에 이르기까지 신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열암곡 석불좌상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아쇼카순례단 회원들.

신라 왕궁의 남쪽에 있어 남산으로 불리는 이곳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천상의 부처님이 하강해 머무는 산으로 여겨졌다. 곳곳에 사찰과 탑, 불상이 새겨져 전성기에는 무려 800여곳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산 일대에는 왕릉 13기, 절터 147곳, 불상 118기, 석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모두 672개의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 국가지정문화재급으로 국보 제312호인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해 보물 12점, 사적 14개소, 중요민속자료 1점, 지방유형문화재 14점, 지방기념물 2점, 문화재 자료 5점에 이른다. 2000년 12월, 이러한 역사와 유물을 인정해 경주 남산 일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주 남산에는 40여개의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마다 등산로와 함께 70여개의 답사코스가 있다. 그 가운데 남산답사 1번지로 여기는 곳은 삼릉에서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사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5-6시간은 족히 걸리기에 필히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야한다.

삼릉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세 분의 왕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지금은 왕릉보다 주변에 자리한 소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쭉쭉 뻗어있는 소나무 사이에 있다보면 누구라도 세상을 초탈한 신선이 되고만다.

그렇지만 문화답사는 삼릉 옆에 자리한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에서 시작한다.

삼존입상은 아미타여래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 대세지 보살이 좌우보처로 자리해있다. 본래 이 삼존불은 현재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3년, 주변에 묻혀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운 것이다.

배동 석조여래 삼존입상(본존불 발등)

배동 삼존불은 구김살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를 연상케 한다. 석공은 신라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여과없이 돌에 새겼을 것이다. 유독 본존불과 관음불의 발등이 눈에 띈다. 멀리 백제 땅 운주사에도 이런 발등을 지닌 불상이 있다. 운주사 석조불감에서 남쪽 산기슭에 아장아장 발걸음을 옮기는듯한 아기부처님 발등이 그러하다.

최근 프랑스에서 ‘한국의 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이란 사진집이 출간됐다. 눈에 띄는 것은 표지이다. 파격적으로 석굴암 본존불 뒷모습을 표지로 내세웠다. 신라 불상의 아름다운 뒤태는 이곳 배동 삼존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뒤로 돌아 관음입상을 바라보니 고대 이탈리아 여신인 비너스 상의 아름다움을 능가한다.

관음입상 뒤태.

불상을 구분할 때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손의 모양이다. 수화로 뜻을 전달하듯 불상은 손으로 법문을 한다. 배동 삼존불의 본존불인 아미타불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것이 시무외인이다. ‘두려움을 없애주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왼손은 아래로 향해 내려놓는다.

이 수인은 여원인으로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겠다’는 의미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삼국시대 불상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이 많다. 전쟁과 질병의 두려움을 막아주고 원하는 바를 다 이뤄주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모든 중생들의 바람일 것이다.

삼릉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부처님은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이다. 땅속에 묻혀있던 이석불은 1964년 발견됐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서였는지 섬세하고 수려한 옷주름은 물론 가사의 끈이나 매듭이 선명하다.

석조여래좌상 왼편으로 조금 더 산길을 오르면 마애보살상을 만나게 된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의 붉은 입술.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모습을 드러낸 관음보살이다. 정병을 든 관음보살은 이쁘고 자상한 이모와 같다. 앵두같은 입술마냥 붉은 입술이 보면 볼수록 정감이 들고 바위에서 금방이라도 걸어나오는 듯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산길을 더 오르면 바위벽면에 선으로 조각한 선각육존불이 나온다.

병풍같이 펼쳐진 커다란 바위에 두 폭의 선각 그림이 새겨져있다. 오른편은 설법하는 석가모니 삼존불이고, 왼편은 아미타 삼존불이다. 본존불 좌우에 보살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 고려불화를 보는 듯 하다.

특히 아미타불이 서 있고 협시보살들이 무릎꿇은 도상은 고려불화의 아미타불 내영도를 연상케한다.

내영도는 착한 사람이 죽을 때 아미타 삼존불이 마중나오는 장면이다.

신라인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이곳에서 아미타불 염불을 했다. 염불소리에 아미타삼존불이 직접 영혼을 맞이하러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것이다. 옆에는 석가삼존불이 자리해 있다.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이 이승을 관장하는 석가모니 불에게 영가를 인수받는 형상이다.

‘호빵맨’을 닮은 선각여래좌상.

남산에는 꼭 단정하고 아름다운 불 보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각육존불을 뒤로 하고 곧장 올라가면 시야가 넓게 트이는 곳에 또 하나의 선각 마애불이 반긴다. 선각여래좌상으로 이름 붙여진 이 마애불은 얼굴과 몸부분은 돋음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표현했다. 유난히 양 볼이 돋음새김으로 강조되어 만화영화 주인공 호빵맨을 보는듯하다. 우뚝한 코와 잘생긴 눈, 늘씬한 몸매 등등 대부분 남산의 불상은 미남형이지만 호빵불(선각여래좌상)은 예외이다. 서글서글한 모습이 쉽게 다가가 편안하게 이야기 하고싶은 삼촌같다.

편안함은 호빵부처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형상강과 너른 들판이 막혔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듯 하다.

호빵부처 왼편으로 부부가 서로 포옹하고있는 듯한 바위가 있다. 부부바위이다. 이 부부바위에서 기도하면 금슬이 좋아지고 가정이 편안할듯하다.

선각여래좌상 옆으로 20여m 가면 보물 제666호 석조여래좌상이 반긴다.

보물 제666호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대좌위에 앉아있는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따랐다. 상호가 원만한 상호와 옷주름이 간결하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많다.

이런저런 상처또한 세월의 연륜이기에 안타깝지만 합장하고 허리 숙인다.

세속에서는 살아있는 이에게 한번 절하고, 죽은 자에게 두 번 절하고, 부처님에게는 세 번 절한다. 신라인들은 임금도 부처의 종으로 여겼다. 신라 진흥왕때였다. 진흥왕이 자신을 절에 노비로 희사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돈을 모아 다시 진흥왕을 되사왔다. 왕을 사온다는 이유로 왕과 왕실, 귀족들이 공양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경주남산 산행이 시작된다. 금오산 정상까지 절반가량 오른셈이다. 앞으로도 상선암-마애석가여래좌상-바둑바위-상사바위-금오산 정상-용장사곡 삼층석탑-용장사지-용장마을까지 걸어야 답사를 마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발길을 돌려야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듯 벌써 점심 무렵이 됐다. 그리고 1천300년 만에 모습을 나툰 부처님을 만나러 가야한다.<박스기사 참조> 이번 경주답사는 10년 전 문화재연구원이 우연히 발견한 열암곡 마애불을 친견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다른 석불좌상 복원작업 중 우연히 발견

열암곡 마애불 발굴이야기

2007년이었다. 경주에서 세상을 떠들썩케한 뉴스가 터졌다. 남산 열암곡에서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1천300여년 전 조성한 온전한 형태의 얼굴을 갖추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무려 70t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다. 바위 한쪽 면에 부조된 마애불은 앞으로 엎어져 있다. 그런데 희유하게도 부처님의 코가 넘어진 바닥의 바위와 불과 5㎝정도 간격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부처님 코가 완연하게 1천년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부처님 코를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인해 한국의 석불은 대부분 얼굴이 망가져있기 마련이다.

열암곡 마애불.

본래 열암곡에는 오래 전부터 목이 없는 석불좌상 한 구가 있었다. 어느 신심깊은 이가 석불의 머리를 찾아 드리겠다고 발원했다. 그리고 수없이 열암곡을 올랐다. 원력이 깊어서였는지 대나무숲에서 불두를 찾게 됐다. 주변의 유구를 모아 불신과 봉합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열암곡 석불좌상이 형태를 갖추게 됐다.

석축을 쌓고 석불좌상의 형태를 복원하던 중이었다. 매일 작업자들이 열암곡을 올랐다. 하루는 작업자 하나가 배탈이 났다. 인원이 부족해 여자 학예사가 동행했다. 점심 무렵 잠시 앉아 쉬는데 앞에 보이던 바위밑이 이상함을 느꼈다. 가까이 가서보니 부드러운 미소를 간직한 부처님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상호를 1천300년 만에 어느 여인에게 내민 것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여전히 앞으로 누워있다. 첨단을 자랑하는 현대기술로도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고 한다. 열암곡 마애불이 일어서는 날, 그날은 화순 운주사의 와불이 일어서는 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더불어 행복한 세상…. 그 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