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붓으로 그려야만 그림이더냐…나무판에 칼로 조각해도 그림이 되더라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경북 상주 남장사 불교음악 ‘범패’ 시원지 남장사 사찰 벽화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2015.04.21.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고려 충숙왕 원년(1314년) 때였다.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명명했다. 경상도의 탄생이다.
이렇듯 상주는 역사가 있는 도시이다.
역사를 갖춘 고을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산천이 수려해야 한다.
상주도 산줄기가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능선으로 이뤄진 스카이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남쪽에 갑장산(甲長山·805m), 서쪽에 노음산(露陰山·729m), 북쪽에 천봉산(天鳳山·435m)이 우뚝 솟아있다.
이른바 상주의 삼악(三嶽)이다. 옛사람들은 노음산을 노악(露嶽), 천봉산을 석악(石嶽) 그리고 갑장산을 연악(淵嶽)이라 불렀다.
산세 수려한 곳에 역사까지 갖추었으니 수많은 생명체가 모여들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문화가 형성됐다. 대부분 문화의 절정은 종교에서 갈무리된다.
그래서 이뤄진 것이 상주의 사장사(四長寺)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길이 흥할 가람으로 장사(長寺)가 자리하고 있다.
노음산에 북장사(北長寺)와 남장사(南長寺), 갑장산에 갑장사(甲長寺)와 승장사(勝長寺)가 그것이다.
전라도의 큰 고을 전주에도 동서남북, 사방에 사찰이 수호신장 마냥 자리해있다. 승암산 동고사(東固寺), 고덕산 남고사(南固寺), 황방산 서고사(西固寺), 호암산 북고사(北固寺·현 진북사)가 그러하다.
지금도 상주에는 북장사, 남장사, 갑장사가 천년을 넘어 문화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아쉽게도 승장사는 갑장산 동북쪽 승장계곡에 절터로만 남았다. 그나마 근래 들어 논으로 개간하면서 절터 흔적도 없어지고, ‘윗승장’, ‘아래승장’이라는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남도에서 떠난 하룻길 여정으로 상주의 4장사를 모두 찾기는 어렵다. 그중에 사세가 가장 흥하다는 남장사로 향한다.
백과사전에 기록된 남장사의 역사는 이렇다.
“832년(흥덕왕 7)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여 장백사(長柏寺)라 했으며, 1186년(명종 16) 각원(覺圓)스님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35년(인조 13) 정수(正修)스님이 금당 등을 중창했다….”
창건주가 진감국사(774-850년)다. 경상도 땅에서 만나는 호남인물이어서 왠지 반갑다.
진감은 시호이고 법명은 혜소(慧昭)이다. 스님은 전북 익산에서 출생했다. 효심 깊은 스님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1세 늦은 나이에 출가해 당나라로 떠났다. 스님은 56세에 신라로 돌아와 불교음악인 범패와 차(茶)를 보급했다. 귀국하여 처음 머문 곳이 남장사이다. 그래서 남장사는 범패의 시원지가 된다.
범패는 세계가 인정하는 음악이다. 지난 2009년 범패의 하나인 영산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영취산에서 설법을 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천인들도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는 영산회상을 재현한 것으로, 죽은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전통의식 가운데 하나다.
4월의 남장사는 영산회상의 무대가 된다.
사찰 내에 자리한 전각과 전각 사이에 수많은 꽃들이 장엄을 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목련이다. 새하얀 꽃봉오리가 어쩜 그리도 화사한지…. 같은 꽃이어도 목련이 큼직큼직하다면, 벚꽃은 바람 부는 대로 꽃비마냥 날려 도량이 그대로 한송이 꽃이 되고 만다. 여기에 군데군데 붉은 동백꽃이 포인트를 주듯 빛을 뿜어 누구라도 꽃 잔치에 취하지 않을 이가 없다.
그렇지만 이 또한 언젠가는 지고 마는 꽃에 불과하다. 하룻밤 비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누구나 지지 않는 꽃을 원한다. 그런데 사찰에 가면 항상 피어있는 꽃을 만날 수 있다.
이제부터 보물찾기에 나서 본다.
쉽게 만나는 꽃은 벽화이다. 전각 벽면에 그려진 그림에는 수많은 꽃들이 자리해있다. 가장 많이 만나는 꽃이 연꽃이다. 벽화뿐 아니라 기둥마다 그려진 단청의 기본이 연꽃이다.
때로는 법당 안에 들어가면 꽃을 든 불상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을 편안케 하는 것은 꽃으로 장식된 문살이다.
남장사 극락보전의 문도 꽃으로 장식돼 있다. 그것도 어간문(정문) 두 짝만 모란과 국화꽃으로 돼 있다. 빨강 파랑 하양 노랑 빛으로 옷을 입어 보는 이의 마음을 곱고 차분하게 한다.
남장사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대로가 그림책이다. 벽면과 기둥에 그려진 그림 하나하나 모두 이야기가 담겨있다.
초조 달마에게 법을 청하는 2조 혜가, 이백이 채석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 별주부전 이야기, 그리고 수많은 선사들의 수행장면 등을 묘사한 다양한 벽화로 가득하다.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눈과 마음이 호강한다.
남장사에서 꼭 눈을 맞춰야 할 또 하나의 보물이 있다. 보광전 후불목탱(보물 제 922호)이다.
보통 탱화는 족자나 액자형태로 벽에 거는 그림을 말한다. 그런데 보광전 후불탱화는 그림이 아닌 나무에 조각한 불화(佛畵)여서 눈길을 끈다.
목각탱은 장방형의 판목 7매와 덮개를 부착시켜 평면 위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새기는 릴리프(Relief) 기법으로 불보살과 신장상을 조각했다.
화면구성은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대범천, 제석천과 사천왕 등 24구가 새겨져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3열로 1열에 4구씩 배치시켜 법을 듣는 이들의 간절함과 질서정연한 장면이 엄숙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목각탱의 강점인 생생한 표현으로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 같은 목각탱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작으로 주로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돼 있다. 국내에는 남장사 산내암자인 관음전 목각탱(보물 923호)을 비롯해 예천 용문사 대장전, 남원 실상사 약수암, 문경 대승사 극락전, 서울 경국사 극락전 등에 목각탱이 남아있다.
특히 남장사 관음전 목각탱은 용문사,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과 더불어 조선 전기 양식으로 17세기 목각탱의 뛰어난 작품 수준을 알려주는 대표작이다.
사실 남장사의 목각예술은 절 입구 일주문에서 미리 예고해 주고 있다.
일주문 활대에 조각된 용의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기둥머리에 새겨진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듯하다.
남장사 일주문을 뒤로 하고 500여m 가량 내려오는데 오른편에 석장승(경북 민속자료 33호)이 서 있다.
고려 초, 강감찬 장군이 상주 목사로 있을 때 비둘기 한 쌍을 구워먹은 부부에게 살생의 업을 알려준 전설이 담겨있다. 이 돌장승은 높이 186㎝ 화강석을 자연 그대로 살려 좌우 대칭을 벗어난 파격이지만 마을 미륵의 형상을 새겼다.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임진칠월립(壬辰七月立)’이란 명문으로 보아 1832년 남장사 대웅전 중창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잘생기지 않은 얼굴에 세모난 민대머리, 눈썹과 눈동자 없이 좌우로 치켜진 툭 나온 왕눈, 왼쪽으로 비뚤어진 세모난 주먹코, 비뚤어지게 꼭 다문 입과 아래쪽으로 난 송곳니가 낯설지 않다. ‘어~여 댕겨오라’며 배웅하는 이웃 할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