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末鮮初 최대 왕실사찰 터…이성계가 참회하며 흘린 ‘龍의 눈물’ 현장
이준엽의 사찰문화기행 /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양주의 문화 아이콘 ‘왕실사찰’ 지공–나옹–무학으로 이어지는 삼화상
2015.07.28.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20년 전, TV 드라마 ‘용의 눈물’이 인기를 끌었다. 조선 개국에서 세종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역사극이다.
용은 왕을 상징한다. 왕은 지존의 자리이지만 눈물의 자리이기도 하다. 자나깨나 백성의 안녕을 걱정하니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을랴. 그러나 드라마 ‘용의 눈물’은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 첫 번째 용, 이성계.
셋째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신덕왕후 소생의 형제가 몰살됐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조 이성계는 눈물을 흘리며 고독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상왕으로 물러난 이성계는 태종이 알게 되면 왕실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염려해 늦은 밤 도망치듯 양주 소요산 소요사로 향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양주 천보산 회암사로 자리를 옮겼다. 깊은 산속 토굴에서 정진중인 무학대사를 회암사로 불러 주지로 임명했다. 그리고 지난날을 참회하며 비참하게 사라진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처럼 회암사는 울어야만 했던 용이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던 터이다.
올 여름은 가뭄으로 시작됐다. 다행히 하늘의 용이 울어야 할 때 눈물을 흘렸다. 장맛비다. 회암사를 찾던 날도 소낙비가 오락가락했다.
회암사는 양주의 진산인 천보산(天寶山, 423m) 자락에 자리해 있다.
산 입구에서 먼저 반기는 것은 회암사지 박물관이다. 2012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회암사가 고려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왕실사찰이었다는 것에 착안해 ‘왕실과 사찰’을 주제로 유물을 전시해놓고 있다.
왕실사찰의 흔적은 박물관 밖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오늘의 회암사는 크게 2개 영역으로 나뉜다. 1만여평에 이르는 회암사지와 지공-나옹-무학 등 삼화상의 부도와 탑이 있는 회암사이다.
사지로 남아있는 옛 회암사는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97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완만한 경사지를 8개의 단으로 축대를 쌓아 영역을 구분했다.
축대마다 위로 오르는 계단 소맷돌은 거대한 통돌로 태극문양이 새겨져있어 회암사가 왕실사찰임을 보여준다. 또한 보광전과 대장전 등 경내지에 조성된 월대(月臺)는 의식과 경연을 펼치는 자리로 궁궐 건물에만 나타나는 양식이다.
회암사 발굴현장의 건물터는 주 전각인 보광전 뒤로 설법전-사리전-태상전으로 이어져 있다. 태상전은 태조 이성계가 회암사에서 머물던 공간인 듯하다.
회암사에 머물던 태조는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와 참회를 했다. 무학대사는 “고기를 먹으면 다시 태어날 때 머리 없는 벌레가 된다”고 했다. 육식을 금한 태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쇠약해졌다. 상태조와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졌을 때 회암사를 찾은 태종은 건강을 염려해 고기 먹기를 권했다. 그러자 상왕 태조는 태종에게 “국왕이 나와 같이 부처님을 숭상하면 고기를 먹겠다”고 제안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상왕 태조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태종은 스스로 팔뚝에 연비하고 불당을 짓고 약사정근을 하며 부친의 회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회암사가 왕실사찰로 자리잡은 것은 고려말 공민왕 때부터이다. 회암사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 지공화상과 나옹화상이 주석하던 사찰이다. 지공화상은 인도인이다. 스님은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리랑카에서 득도한 후 티베트-원나라를 거쳐 고려에까지 불법을 전했다.
고려에 왔던 때가 1326년경으로 추정된다. 약 3년가량 금강산을 비롯해 회암사, 통도사 등에서 교화했다.
광주 무등산에도 지공화상의 흔적이 남아있다. 장불재에서 규봉암으로 가다보면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지대가 나온다. 지공너덜이다. 지공화상은 이곳에서 석실을 만들고 정진하면서 법력으로 억만 개의 돌을 깔아놓았는데, 밟아도 돌이 덜컥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공화상이 회암사에 와서 보니 산세가 인도 나란다 대학과 같았다. 수십년만에 이역만리 동쪽 땅끝에서 향수에 젖었다.
공민왕의 왕사 나옹화상은 지공화상의 제자이다. 원나라로 유학을 가서 지공화상 휘하에서 공부했다.
귀국에 앞서 스승 지공화상이 “고려국 삼산양수간(三山兩手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면 나라가 흥할 것이다”며 불사를 당부했다.
구한말 대강사인 박한영 스님은 “삼산은 삼각산을 뜻하고, 양수는 임진강과 한강이며, 두 강 사이에 있는 곳이 회암사”라고 주장한다.
나라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고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가 회암사에 주석하게 됐다.
태조가 회암사에 장기간 머물다보니 사격은 날로 커졌다.
태종은 물론 세종 때는 효령대군이 대대적인 불사를 했다. 이후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 때까지 회암사는 조선최대의 왕실사찰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는 것(諸行無常)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회암사는 임진왜란 전후로 폐사되었다. 많은 이들이 추측하건대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에 반발한 유생들이 불태웠을 거라는 설이다.
회암사지 뒤편으로 300여m 산길로 오르면 회암사가 나온다. 현재의 회암사는 지공-나옹-무학화상의 부도와 탑비를 지키기 위해 건립되었다. 삼화상의 부도와 탑비가 연이어진 고갯마루는 풍수상 백호의 콧날에 해당한다고 한다.
삼화상의 부도와 탑비가운데 무학화상의 부도는 태조가 조성한 수탑(壽塔. 보물 제388호)이다. 수탑은 스님이 열반하기 전에 미리 만든 부도로 무학화상 부도는 임금이 조성한 국내 유일의 수탑이다. 태조가 만들어준 무학화상의 부도는 삼화상의 부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회암사를 나서는데 나무판에 새긴 시 한편이 눈에 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나옹선사
어처구니, 지체 높은 건물 위에 놓인 잡상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 때 쓰는 도구가 맷돌이다. 맷돌을 돌리는 나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한다. 맷돌의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 없다. 맷돌의 손잡이가 없는 것, 즉 ‘어처구니 없다’는 말은 ‘어이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어처구니(於處軀尼)’를 풀어보면 주로 ‘없다’의 앞에 쓰여 ‘어디에다가 몸을 둘지 모른다’는 의미로, ‘상상 밖에 엄청나게 큰 물건이나 사람’을 뜻한다.
일상적으로 ‘어처구니 없다’는 것은 하도 엄청나거나, 너무 뜻밖인 일을 당하거나, 해서는 안 될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본래 어처구니는 궁궐이나 성문 등 지체 높은 집의 지붕을 올릴 때 액운을 떨치기 위해 처마에 장식한 ‘토기(잡상)’를 말한다. 궁궐을 지을 때 깜박 잊고 지붕 위에 잡상(어처구니)을 올려놓지 않으면 사람들이 기와장이에게 “쯧쯧, 어처구니가 없구먼”이라며 혀를 차기 마련이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어처구니는 궁궐이나 도성 성문 지붕마루에 3개에서 11개까지 올려놓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지붕 위의 어처구니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물로 순서대로 삼장법사(大唐師傳), 손오공(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和尙),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 등 10신상이 있다
어처구니는 왕실원찰에도 등장한다. 고려말 조선시대 대표적인 왕실원찰인 양주 회암사 전각에도 어처구니가 있었다.
회암사 터에서 발굴한 어처구니는 크기 40㎝ 가량으로 대부분 원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건축의 어처구니는 대부분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회암사지 박물관에 전시중인 어처구니는 조선 초기유물로 문화재 가치가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