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금강산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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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문화기행]강원도 고성 금강산 건봉사

1만일의 염불 기도 끝나자 하늘로 올라 극락왕생

아쇼카순례단-해설이 있는 사찰 순례

2017.08.24.

건봉사를 찾은 아쇼카순례단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건봉사 전경. 건봉사 대웅전. 건봉사 홍예교 중 가장 크고 우람한 능파교. 십바라밀 석주. 신라때 발징화상과 염불행자들이 하늘로 올라간 등공대.

참으로 무심한 것이 시간인가 보다. ‘덥다 덥다’ 허둥대다 보니 말복이 지났다. 그래도 여전히 여름은 여름이다. 근래들어 무더위에 대처하는 법으로 자동차 여행을 꼽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아래에 앉아서 창밖의 폭염을 즐길 수 있으니 이만한 피서가 또 있으랴.

차를 타고 남도 빛고을에서 가장 먼 곳은 강원도 고성이다. 그곳에 금강산 건봉사가 자리해있다.

휴전선을 지나고도 한참을 달려 진부령을 넘어서니 공기가 스산하다. 본격적으로 군사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기운이라는 것이 그렇다. 같은 땅이건만 젊은이들이 서로 총을 맞대고 사는 지역이어서인지 공기가 무겁다. 저절로 몸과 마음이 다잡아진다.

1992년까지만 해도 건봉사를 찾으려면 군부대에 미리 연락을 해야 했다. 민통선 안에 있어 건봉사 찾기가 쉽지 않았다.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달려있는 일주문에 들어서고 나니 ‘부처님 집’이라는 편안함으로 긴장이 풀린다. 기둥이 한 줄이어서 일주문이건만 특이하게 건봉사 일주문은 기둥이 네 개다. 1920년 세운 일주문은 둥근 돌기둥 위에 목조지붕이 올려져있다. 돌기둥에 큼직한 금강저가 새겨져있는 것을 보니 도량 수호의 뜻이 담긴 금강문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 경제사정이 여의치 못해 그랬을 것이다. 일주문 기둥이 격을 갖추지 않고 4개인 사연도 쉽게 건립하기 위함인 듯하다.

그래도 건봉사 일주문은 6·25 한국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목조건물이어서 정감이 간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건봉사는 조선 4대 사찰이자 31본산의 하나였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거대사찰이었지만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 전쟁 때 소실되고, 오랜 세월 폐사지로 남았다가 근래들어 하나 둘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건봉사의 역사는 1천500여년에 이른다. 초창은 520년(신라 법흥왕 7년)으로 고구려땅인 이곳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했다. 758년(경덕왕 17년) 발진화상이 중건하면서 대찰의 격을 갖추게 됐다. 이때 발진화상은 정신, 양순스님 등과 염불만일회를 개설해 정진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고려말에는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꿨다. 그 뒤에 1358년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해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됐다.

조선시대에는 1465년 세조가 원당으로 삼아 어실각을 지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됐고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해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1605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해 갔던 부처님 사리를 되찾아와 이곳에 봉안했다.

건봉사 부처님을 친견하려면 5개의 홍예교를 건너야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우람한 돌다리가 능파교이다.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凌波)로 다리를 건너면 십바라밀 석주를 만난다.

다리 양쪽에 서있는 2개의 석주는 158㎝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으로 특이한 문양이 각각 5개씩 새겨져있다. 대승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이같이 돌에 십바라밀을 문양으로 새겨둔 곳은 건봉사가 유일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이들의 화두이다. 그 방법론으로 불교에서는 십바라밀을 제시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화엄경’에 근거를 둔다. 정진혜보살의 물음을 받고 법혜보살이 방일하지 않는 열 가지 행법과 그 행법으로부터 이루는 열 가지 청정한 법을 말하고 있다. 그 열 가지 행법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바라밀 등 6바라밀에 방편·원(願)·역(力)·지(智)바라밀을 더해 십바라밀이다.

오늘을 사는 이라면 누구나 곱씹어 봐야할 생활규범이다.

①원(圓)은 보시바라밀을 상징한다. 재물과 진리, 두려움을 없애주는 3종의 보시를 베풀되 청정한 허공에 보름달의 광명이 두루 비치듯이 해야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②반원은 지계바라밀을 상징한다. 계율을 지켜 나쁜 일을 하지 않아 청정해지는 것으로 마치 상현달(반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아지는 것을 상징한다.

③신발(鞋經)은 인욕바라밀을 상징한다. 외부의 욕됨을 견디어 참으면서 안으로 법성을 밝히는 것으로 마치 신이 밖으로부터 찔리는 것을 방어해 발을 안전하게 하는 것과 같다.

④가위(剪刀)는 정진바라밀을 상징한다. 수행하되 결코 물러나지 않음이 마치 가위로 물건을 자르듯이 한다.

⑤구름(雲)은 선정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대지의 열을 식혀 맑고 서늘하게 함과 같다.

⑥금강저(金剛杵)는 지혜바라밀을 상징한다. 견고함, 예리함, 밝음으로 두터운 번뇌의 산을 부수고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 금강저와 같이 하라는 것이다.

⑦좌우쌍정(左右雙井)은 방편바라밀을 상징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케 해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치 근원이 하나인 샘을 두 개의 샘으로 나눠 동서에 두루 편하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⑧전후쌍정(前後雙井)은 원(願)바라밀을 상징한다. 작은 두 개의 원을 아래위로 둔 것으로 마치 앞과 뒤의 두 개의 샘에서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모두가 물을 얻는 것과 같다.

⑨탁환이주(卓環二周)는 역(力)바라밀을 상징한다. 집과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담을 나타낸 것으로 마치 집과 담을 수리·축성해 밤낮으로 순시해 외침을 막는 것과 같다.

⑩성중원월(星中圓月)은 지(智)바라밀을 상징한다. 큰 원 안에 세 개의 작은 원을 그린 것은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마치 달이 별 무리들 속에 있으면서도 멀고 가까운 곳을 다 비치는 것과 같다.

이번 건봉사 순례에서 마음을 뒀던 곳은 등공대다.

1천300년 전, 발징화상과 만일염불 수행자들이 함께 하늘로 올라 극락왕생했던 자리다. 수차례 건봉사를 찾았건만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다.

등공대는 대웅전 뒤로 1.5㎞ 산행을 해야한다. 미리 군부대에 허락을 얻어 산길을 오르는데 길 옆에 지뢰지대를 알리는 표지판이 마음에 걸린다. 마치 오탁악세에 물든 세상과 다르지 않다. 오직 염불에만 의지해 정토세상에 나아가듯, 길 아닌 곳은 발걸음을 하지 않아야 등공대에 이를 수 있다.

신라 때 만일염불행자들은 스님 31인과 신도 1천820인이 참여하였다. 신도들 가운데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 수행자들을 봉양했다. 787년, 마침내 1만일간의 염불기도를 회향하던 날,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고 그 자리에서 하늘로 올라 극락왕생했다.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그 후 400여년이 흘러 남도땅 강진 백련사에서도 염불정진 결사가 시작됐다. 요세스님이 주관한 백련결사로 주로 재가신도들이 참여하는 결사였다. 힘들고 어려울 때, 민중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염불뿐이었다.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염불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돈 돈하며 돈을 염할 것이다. 그렇지만 더 많은 이들이 평화, 통일, 화합을 부처로 여겨 염한다.

예로부터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이 있다. 염불, 하기는 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는 어렵다. 건봉사 등명대를 돌아서는데 ‘염불은 꼭 이뤄진다’는 울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도굴꾼에 의해 빛을 본 부처님 치아사리 임란당시 왜구 약탈…사명대사가 환수

1986년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민통선 검문소에 민간인들이 나타났다. 미리 군부대에 대학교 문화재조사단이라고 연락한 터여서 민통선을 지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도굴범이었다.

당시 건봉사는 폐사지나 다름없었다. 군부대의 승낙 없이 갈 수 없는 군사지역이어서 사찰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문화재조사단이라고 속인 도굴범들은 군인들의 보호아래 편안하게 건봉사를 뒤졌던 것이다.

그런데 사리탑에서 사리가 나왔다. 건봉사 사리는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사리 가운데 일부로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됐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 갔고,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왔다. 사명대사는 도난을 우려해 사리를 나눠 금강산 건봉사에도 안치했다.

도굴범에 의해 4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사리는 모두 12과였다. 사리의 신비함이었을까. 이때부터 도굴범들은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 신장들이 나타나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 했다. 후손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꿈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어느 여관에 사리를 놓고 불교계 관계자에게 연락했다. 그때서야 세상사람들은 건봉사 사리가 도난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고 도굴범들은 잡혔다. 안타깝게 사리 8과를 찾았으나 나머지 4과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건봉사에 사리탑을 다시 조성하고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기에 앞서 전국 투어를 했다. 부처님 치아사리 친견 전국순회법회였다. 지역마다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려 한 이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그리고 사리탑에 사리 3과를 봉안했다. 나머지 사리 5과는 만일염불당에 봉안해 누구나 친견할 수 있도록 했다. 건봉사에 가면 부처님 치아를 비롯해 사리를 만날 수 있다.